서재 이름 짓기 / 구활
이름을 정하는 날이다. 한지에 자활(滋活) 활(活)이라 쓴 두 개의 쪽지가 공중으로 날아올랐다. 아버지가 던지고 어머니가 집어 들었다.
“활 자를 잡았네요.”
어머니가 한마디 툭 던졌다.
“자활이나 활이나 같은 거요, 활 자 안에도 행렬 자가 다 들어 있어요.”
하늘이 푸르른 가을날 고향집 대청마루에서 있었던 이름 정하는 놀이가 끝나자 내 본명은 그렇게 정해졌다.
나는 아호가 없다. 필명도 없고 이렇다 할 별명도 없다. 내 나이 네 살 때 돌아가신 아버지가 지어 주신 할(活) 자 한 자만 달랑 매고 다니니까 훨씬 가벼웠다. 또래 아이들이 ‘구할 구푼’이라고 놀릴 때는 아버지가 원망스러운 적도 있었지만 그건 잠시였다. 세월이 지날수록 불타기도 쉬웠고 날아다니기도 한결 편했다. 활활 훨훨.
젊은 시절, ROTC 동기생들이 돌림자를 곡(谷)자로 정한 아호 하나씩을 지어 운곡이니 풍곡이니 해사며 자랑스럽게 부르고 다녔다. 나도 그럴싸한 호 하나를 지어 벼슬처럼 달고 다닐까 생각해 보다가 이내 고개를 가로 젓고 말았다. 내 깜냥도 깜냥이지만 나의 이름 속에 아호와 필명까지 뭉뚱그려 지어주신 아버지를 생각하면 불경죄를 저지르는 것 같아 함부로 염을 내지 못했다.
이 세상에 알려진 나의 이름은 오로지 활(活) 자 한 자뿐 다른 어떤 호칭이나 재고번호는 없다. 나의 선후배를 비롯하여 지인들의 상당수가 아호를 가지고 있고 옛 선비들처럼 자(字)까지 지니고 있는 이를 볼 때 ‘나는 참으로 빈한하다’는 생각이 들기도 한다. 그러나 구활이란 본명을 있는 그대로 풀어 보면 ‘갖춰서(具) 산다(活)’는 뜻이니 아호가 없음을 그렇게 애달파 할 일은 아닌 것 같다.
마흔 초반부터 틈틈이 써 오던 산문 쓰기가 은퇴 후엔 본업이 되고 말았다. 신문기자에서 문필가로 직함이 바뀌자 주위에서 ‘아호가 필요할 거야’란 충동질을 해댔다. 그러나 나는 초심을 버리지 않았다. 오히려 ‘아호가 왜 필요한가’라는 부정적인 쪽으로 기울 정도로 내공은 더욱 단단해졌다.
나의 글쓰기 주제가 고향 이야기에서 문화유산답사로 기울었다가 옛 선비들의 풍류 쪽으로 선회할 즈음에 문득 한 생각이 떠올랐다. 아호는 없지만 서재의 당호는 근사한 것으로 지어 보면 어떨까 싶었다. 서재 이름은 대부분 중국의 고사에서 따온 것들이 대부분이었고 스승을 흠모하는 제자들이 어른의 아호 중에 한 자를 슬쩍하거나 통째로 도용하는 경우도 없지 않았다.
서소(書巢), 서창(書倉), 서굴(書窟) 등 은유와 상징이 결여된 사실화 같은 당호는 전혀 문학적이지 못했다. 송나라 때 유식(劉式)은 ‘먹글씨로 이뤄진 집’이란 뜻으로 묵장(墨莊)이란 당호를 사용했다. 그가 죽자 그의 아내가 읽던 책 천여 권을 한자리에 모아 놓고 아들들을 불러 아버지의 뜻을 전했다. 그후 청나라 이정원과 호승공이란 사람은 유식의 뜻을 기려 자신의 호를 묵장이라 했다. 서재 이름이라면 이 정도는 되어야지.
에라 모르겠다. 책과 붓 벼루를 사랑한 선비들이 글과 먹(書墨)을 서재 이름 또는 아호로 사용하는 것은 너무나 당연하다. 그러나 풍류를 좇아 낭만의 숲속에 살기를 희원하는 나같이 천학비재한 사람에겐 당치 않는 일이다. 나는 나의 길을 가야한다. 그러나 프랭크 사나트라가 부른 <마이 웨이(My Way)>라는 노래가사만 떠오를 뿐 내게 맞는 서재 이름이 좀처럼 생각나지 않아 낑낑댄 지가 꽤 오래되었다.
한학을 하는 아버지 밑에서 서권기 문자향(書卷氣 文字香)을 일찍 체득한 현대의 어느 선비가 서재 이름을 수경실(修綆室)로 지었다는 글을 읽고 ‘옳다. 이것이다’싶었다. 수경이란 뜻은 ‘우물이 깊으면 두레박줄이 길어야 한다’는 뜻이다. 그는 아버지가 길어 올리다만 한학이란 깊은 우물에 긴 줄이 달린 두레박으로 한시도 쉬지 않고 우물물을 퍼 올리고 있다니 이것 또한 배울 바가 아닌가.
그는 주위의 친지 몇몇이 서재 이름을 지어 달라는 집요한 요청을 거절하지 못하고 아하실(雅何室), 초궁실(楚弓室), 향불헌(香不軒)이란 당호를 지어 주었다고 한다. 아하실은 ‘방은 크기보다 운치가 있어야 한다’는 뜻으로, 또 초궁실은 ‘초나라 임금이 사냥 나갔다가 활을 잃어버렸지만 그 장소가 초나라 땅 안이어서 상관하지 않는다’는 고사에서 따왔다고 한다. 나머지 향불헌은 ‘자신의 삶이 향기로운지를 늘 자문하며 살라’고 그렇게 지었다고 한다.
이거 참 큰일 났네. 내 주위에는 한학에 밝은 스승이나 친구도 없고 그렇다고 명리학에 밝은 역술가를 찾아갈 수도 없다. 가만 있자, 연전에 서재에 대한 원고청탁을 받고 써둔 글이 있는데 그걸 찾아보자.
“내 서재 이름은 류개정(流開亭)이다. 수류화개(水流花開)에서 따온 것이다. 물 흘러가는 계곡에 온갖 꽃들이 만발해 있으니 이보다 더 좋을 수는 없다. 풍류의 극치다. 계류수에 언뜻 언뜻 비치는 구름은 덤이며, 꽃덤불 사이에서 들리는 맑은 새 소리는 우수다. 중국 송나라 때 황산곡(黃山谷)이란 시인이 읊은 ‘구만리 푸른 하늘에 구름 일고 비가 오도다. 빈산엔 사람조차 없는데 물이 흐르고 꽃이 피는구나(萬里長天 雲氣雨來 空山無人 水流花開)’라는 시에서 비롯된 수류화개가 세월이 흐르면서 풍류를 대변하는 문구로 쓰이고 있으니 어찌 ‘예술은 길다’라는 말에 이의를 달겠는가.”
마감에 쫓겨 허투로 쓴 류개정이란 서재 이야기를 농담에서 건져낸 진담으로 돌려놓아야겠다. 선비들이야 책둥지를 안고 밤을 새우든가 말든가 나는 꽃이 만발한 개울가에 앉아 막걸리를 마시며 가야금 산조나 들었으면. 그나저나 당호 편액 글씨는 누구에게 부탁하지.