만종의 추억 / 천경자
내가 유치원에 다닐 때, 어느 날 아버지가 고을에는 단 하나밖에 없는 이발소에 나를 데려가셨다. 그때, 거울 속에서 서양 풍경화를 처음으로 보았다. 그날, 집에 돌아와서는 어머니에게 매를 맞고 사립문 밖으로 쫓겨났었다.
어머니는 비단 상자를 만들어놓고 그 안에 어머니가 수놓은 것들을 넣어두셨는데, 나는 어머니가 안 계실 때면 몰래 그 수를 꺼내 보곤 하였다. 아버지를 따라 이발소에서 돌아왔을 때도, 그 수 상자가 제자리에서 움직여졌다면서 내가 또 만졌다고 해서 매를 맞았는데, 다음날 나는 유치원에 가서 아이들에게 우리 엄마는 의붓어미라고 수문을 내었다.
소학교 5학년 때 교실 벽에 붙은 두 장의 그림 중의 하나가 앞서 말한 그 그림이었다. 담임 선생님이 그 그림을 밀레라는 유명한 화가가 그린 것이라고 말해주면서 그림의 제목까지 가르쳐주었다. 그것은 '이삭 줍은 여인들' 과 '만종' 이었는데 이발소에서 본 그림은 '만종' 이었다.
어린 마음에도 화면의 전체 색조와 이삭 줍은 여인의 머리에 쓴 수건의 색과 조화에 그저 황홀한 마음으로 앉아 있었다. 그때, 옆의 아이가 재잘거리며 말을 걸어와 무심코 좀 대꾸를 했다가 느닷없이 선생님의 회초리를 맞아 새끼손가락을 다쳐서 옥도정기를 발랐었다. 이상하게도 밀레의 명화를 보았다 하면 무슨 기념처럼 매를 맞는데, 이것뿐만 아니다.
장성해서 일본에 가 본격적으로 미술 공부를 하게 되어 미전(지금의 동경 여자 미술 대학)에 들어갔다. 그때, 그 학교에서 니시다 마나이키 교수의 미학 강의가 인기 있었다. 어느 날 '만종' 을 가져와서, "경건히 기도 드리는 두 남녀 어깨 조금 아래로 펼쳐진 지평선을 보라. 만약에 이 지평선이 인물의 어깨 더 아래로 내려갔다든가 더 위로 올라갔어도, 이 종소리 울리는 듯한 경건한 분위기는 말살되고 말았을 것이다." 라고 풀이해주다가 카이저 수염을 실룩 움직이더니 느닷없이 나를 손가락질하면서 자기가 방금 뭐라고 그랬는지 그대로 말해보라는 것이다. 이것은 과년한 처녀를 때리지는 못하고 대신 면박을 준 것인데, 왜 나보고 그랬는지는 아직도 이해가 가지 않는다. 나는 그 선생의 강의를 열심이 듣고 있었는데…….
세월이 흘러갔다. 나의 인생에 있어서 젊었던 시절은 아주 칠흑같이 불행하고 가난했던 세월이었다. 어느 해, 가난 속에서 수술을 받으러 병원에 갔었다. 텅 빈 입원실 초라한 침대 위에 누운 내가 마취에서 깨어나니, 이상한 향기가 가슴에 틀어올라와 입안이 화끈 달아오르는 것 같아서 입을 벌리자 입에서 많은 꽃이 쏟아져 나왔다.
물망초, 무꽃, 오랑캐꽃, 보랏빛 꽃들이 마법의 항아리에서 나오는 것처럼 내 입에서 토해져 비누방울처럼 가볍게 벽에 부딪쳐 사라져가는 것이었다. 확실히 의식을 되찾고 보니 병원 벽에는 단 하난 퇴색된 '만종' 이 걸려 있을 뿐이었다.
나는 반가워서 미친 사람처럼 그림하고 대화를 했다. 그림의 말은 나의 온갖 굴욕과 가난의 시련, 또 아픈 세례를 달래주고 오붓한 평화를 되찾게 해주어 나는 눈물을 흘릴 수 있었다.
이렇게 많은 추억을 안겨준 밀레의 그림이 지금 서울에 왔다.
며칠 전에 전람회장에 갔다가 문득 겁이 났다. 아니, 인쇄된 밀레로 복사된 그림을 보기만 해도 회초리매를 맞거나 손가락을 다쳤는데, 이 진짜 밀레의 그림을 보면 이번엔 큰 몽둥이 찜질을 당하지나 않을까 하는 때문이다.
천경자(1924-2015) 동양화가 수필집 ‘유성(遊星)이 가는 곳’ ‘언덕 위의 양옥집’ ‘탱고가 흐르는 황혼’