오로라를 그리다
박진희
노르웨이의 항구도시, 베르겐에서 크루즈를 탔다. 친구의 권유로 결정했지만 사실은 그림을 그릴 소재를 찾기 위한 여행이었다. 트롱하임을 거쳐 트롬소와 러시아의 국경 도시인 커크니스를 거쳐 돌아오는 2019년 10월, 십여 일간의 여정이었다. 난 바다와 먼 곳에서 태어나고 미국에서도 바다 멀리 살아온 터라, 하루 종일 바다만 바라보다 저녁쯤 도시를 걸어보는 건 어떨지 무척 설레었는데 상상 이상이었다. '세상 모든 시름 잊고' 순수 자연의 모습을 몰입해서 즐길 수 있는 절호의 기회였다.
무엇보다 물이 깨끗해 어디서든 실컷 마셨다. 대구와 청어 뿐 아니라 연어를 비롯해서 싱싱한 해산물이 입에 잘 맞았다. 하루에 몇 시간씩 노르웨이 역사, 지형, 문화, 환경에 대한 클래스를 참석했는데 참신한 정보가 가득했다. 트롬소 출신으로 세계 최고의 도시라며 자랑스러워 하는 귀여운 남자 요원이 인상적이었다. 그는 오로라가 나타날 때마다 방송으로 알려주었다. 게다가 유머를 적절하게 넣어 4개 국어를 얼마나 유창하게 구술하는지 언어학자들도 혀를 내둘 정도였다.
한국 남해안의 르아스식 해안과 비슷한 형태로 노르웨이의 피오르 (Fjords)가 있다. 그 뜻은 ‘다른 곳으로의 여행’이라고 한다. 그래서 8세기부터 11세기동안 바이킹족은 ‘다른 나라로의 여행’을 도전적으로 했을까. 세계에서는 그 반대로 ‘그 곳으로의 여행’을 즐긴다. 피오르 협곡을 돌면서 고대 자연을 그대로 볼 수 있는 것에 모두 숨을 죽이고 경건해졌다. 고요가 가득해서 수십억만년이 넘은 지구의 침묵이 그대로 느껴졌다. 아주 옛날에 하늘과 지구를 넘나드는 거인들이 있었을까. 그들이 하늘을 향해 잠든 모습으로 검은 바위가 되어 누워있는가. 마치 하늘과 지구에서 모든 여행을 끝내고 평안히 잠들고 있는 듯 보였다.
지구의 가장 맨 끝 북쪽 대륙에 위치한 'North Cape'은 정말 춥고 바람이 얼마나 거센지, 북극을 날아다니는 야릇한 기분을 상상했다. 트롬소에 위치한 삼각형 모형의 Artic 천주교회당에서 밤 12시에 열린 'Midnight Concert'는 독특하고 환상적이었다. 노르웨이 전통 음악과 사미(Sami)족의 노래는 너무나 순수하고 우아해서 마치 천사의 목소리 같았다. 오로라와 아주 가까이 살아가는 사미족은 스칸디나비아 반도와 러시아에 퍼져 살고 있다. 사미족 박물관을 방문했는데 풍속과 문화가 아메리칸 인디언과 흡사한데가 많아 놀랐다. 지형적으로 빙하시대 후예를 연상케 하며 지금도 자연과 함께 살아가는게 신기했다. 사미 사람들에 따르면 크리스마스가 되면 유명해지는 ‘루돌프 사슴’은 새끼들을 보호하는 차원에서 겨울에 뿔이 나기 때문에 수컷이 아니라 암컷이라고 한다. 루돌프가 젊은 청년쯤으로 상상하고 있었는데, 새로운 사실이었다. 크리스마스가 아니어도 루돌프들과 더불어 사는 그들이 떠올라 청아한 자연의 소리가 담긴 사미 노래를 찾아 듣게 된다.
오로라는 맨 눈으로 보면 허옇고 사알짝 옅은 연두색이 돈다. 사진에서 보는 오로라는 특별렌즈로 촬영한 것이라 녹색이 짙어 보인다. 특히 트롬소 근처에 있던 3-4일간 오로라를 하룻밤 몇시간 동안 잠을 설치면서 영하의 바람도 아랑곳 없이 실컷 보았다. 오로라는 산소와 나이트로젠이 에너지를 얻어 빛을 내는 분자들로 북극과 남극에서만 차가운 맑은 밤에 보인다. 산소는 노랑연두와 빨강색, 나이트로젠은 파랑색을 띄는데 이 둘이 합쳐지면 흰색, 핑크, 보라색이 되어 춤춘다고 한다. 바람에 따라 빛은 살랑거리듯 고고하게 나부끼기도 하고 프리즘으로 하늘나라의 성벽을 슬며시 비추는 듯하다. 그러다 곡선으로 흩날리며 여운을 남기고 사라졌다가 슬며시 더 큰 자유의 빛으로 흩날린다. 그리고 소리 없는 힘찬 합창과 함께 오케스트라 협주곡을 들려주는 것 같이 광활하고 장엄하다. 고대의 바람결, 그 리듬에 온 몸과 마음이 흥분에 겨워 날아 친다. 별들은 더욱 가까이 환하게 빛난다. 처음이다, 나와 하늘이 이처럼 가까운 것은. 이토록 황홀하게 감길 듯 춤추는 건, 우주가 보내는 하나님을 향한 찬란한 사랑의 고백일까. 하나님도 함께하시는 거룩하고 신비스런 오묘한 사랑의 모습일까. 아, 이 세상 어디 까지가 사랑일까!
러시아 국경에서 세 걸음 앞두고 다시 베르겐으로 돌아오는 길에 거친 폭풍을 만났다. 배가 얼마나 흔들리는지 준비해간 배멀미약도 소용없었다. 하루 종일 몽롱했지만 견딜 만했다. 돌아오면서 들러 볼 명소 방문이 폭풍으로 배를 항구 쪽으로 댈 수 없어 취소되었지만 크게 상관하지 않았다. 오로라를 두번 다 보지 못하고, 이번이 세번째 여행이라는 나이든 커플은 정말 행복해 보였고 다른 여행인들도 마찬가지였다. 오로라 보기가 그렇게 어렵다는데 천운이었을까. 그걸 실컷 본 사람들의 얼굴엔 사랑에 취한듯 미소가 가득했다.
아쉬운 여행이 끝나고 거기서 기억에 담았던 오로라를 그려 보기로 했다. 그 리듬을 경직된 모습으로 화폭에 옮기는 작업은 오래 걸렸고 멈추지 않는 사랑처럼 앞으로도 계속될 것이다. 내 앞에 며칠간 펼쳐진 오로라가 그림에서나마 춤추며 언제나 함께 하길 소망하면서.