펄 벅의 그린 힐스 팜에서
박진희
펄 벅 재단이 펜실바니아 주에 있다는 사실을 오래 전에 알고 있었지만 직접 찾기 까지 수십년이 걸렸다. 피츠버그에서 필라델피아까지 6시간 운전 거리인데 그녀의 성을 딴 Buck’s County, Green Hills Farm까지 5시간 17분이 소요되었다. 그곳에 1949년 Welcome House가 설립되고 1964년 Pearl S. Buck Foundation 이 정식으로 창립되었다. 국제입양규약 변경으로 2014년에 Welcome House가 없어지고 입양 없이 자금 보조형식으로 바뀌어 지금은 Pearl S. Buck International로 불린다. 하루 전에 예약을 해서 35년간 영문학교사를 했던 도슨트의 설명과 안내를 받았다. 펄이 1935년경 52에이커의 대지를 구입했는데 현재 68에이커, 거의 8만3천여 평으로 확장되었다. Welcome Center건물에 들어서면 기프트 샾을 가운데로, 오른편에 사무실, 교육원, 회의장이 있고 왼편에 12개의 명예박사학위 및 퓰리처와 노벨상장이 전시되어 있다. 그린 힐스 농장의 예전 외양간이 문화센터로 변신한 입구엔 고운 꽃이 가득하다. 펄이 거주한 은회색 돌로 지어진 스톤 하우스는 녹색 초원 위에 은은한 빛을 발하고 있다.
펄은 중국에서 대략40년, 미국에서 40년 살았다. 중국어가 모국어가 된 데는 보모 마의 영향이 컸다. 그녀를 따라 자주 절에 다니며 불교를 접했다. 공 선생은 펄이 13세 까지 개인 교사로 유교 철학사상을 심어주었고, 부모는 장로교 선교사라서 크리스찬으로 성장했다. 동양문화를 실생활과 교육으로 접하면서 남다른 인류애와 균형 잡힌 세계관과 열린 시각과 사상을 문학과 삶으로 보여주었다. 찰스 디킨스를 6세부터 즐겨 읽고 에세이를 쓰기 시작했던 그녀는 사회 문제점을 발견하는 혜안과 그것을 비판하는 용기를 배웠을 것이다. 엄마는 늘 미국이 최고라며 찬양했으나 18세에 미국 대학에서 본 고국의 모습은 현실과 너무 다르고 여자와 흑인에 대한 편견으로 혼란스러웠다. 여대에서 심리학을 전공하고 남기를 원했으나 아픈 엄마를 위해 중국으로 돌아간 후 자신을 찾고 싶었다. 중국인들이 어둠 속에 있다면서 그들을 선교하기 위해 헌신하는 부모와 다른, 자신만의 특별한 미션을 직감했다.
중국 농업 선교사로 농민 경제에 관심있던 코널대 출신인 로싱 벅을 만나 25세에 결혼했다. 로싱은 아내가 디킨스 책을 읽는 걸 싫어하고 성경책을 보기를 원하는 등, 너무나 달라 펄은 곧 후회하게 되었다. 펄의 유일한 친딸인 캐롤이 태어나고 자궁종양으로 불임이 되자 남편과 사이는 더 멀어졌다. 난징에서 폭도들이 펄의 집에 불을 지르고 약탈하는 상황에서 겨우 피신하여 위기를 모면했지만 정상이 아닌 딸 목숨의 위협을 느꼈다. 록펠러재단이 로싱에게 연구비 지원 제의로 잠시 미국에 방문하면서 캐롤이 평생5살 정도의 정신적 감성적 불치병인 PKU(페닐케톤뇨증) 로 진단을 받고 뉴저지의 요양학교로 보냈다. 대가족을 갖고 싶었던 펄은 미국 고아원에서 제니스를 양녀로 맞아 함께 중국으로 돌아갔다. 글을 쓰게 된 이유라면 자신이 알고 있는 중국의 얘기를 세상 사람들에게 알려주고 싶은 욕구가 있었다. 하지만 캐롤을 요양하기 위해 비싼 비용을 감당해야 하는 엄마의 의무가 더 큰 동기였다. 그녀가 구입한 집이 4천 6백 달러에 비해 캐롤의 학비는 매년 2천 달러나 되었다. 로싱은 캐롤의 상태를 비관하여 일에만 빠져 지내다 17년간의 결혼생활은 끝났다.
아무도 관심 없는 자신의 <<동풍 서풍>>을 인정하며 가능성을 단번에 간파한 유명한 출판사 사장을 알게 되었다. 하버드 출신으로 작가이기도 한 리차드 월시는 펄이 쓴 ‘왕룽’을 ‘대지’로 책 이름을 바꾸자고 권했던 마케팅에 천부적인 사람이었다. 펄은 전 남편과 이혼하자마자 리차드와 재혼했다. 리차드는 <<대지>>를 당시 담배 값 정도에 준하는 pocket book으로 만들어 대량 판매로 70여개의 언어로 번역하는 전무후무한 일에 기여했다. 캐롤의 학교 요양기관이 있던 뉴저지 Vineland 에서 한시간 남짓 걸리는 필라델피아의 북쪽에 위치한 스톤 하우스 사진을 보고 단번에 구입했다. 집을 보수하고 리모델링으로 돈과 시간이 소요되었지만 그 가치가 있었다. 내부는 펄이 중국에서 <<대지>>를 3개월간 단숨에 집필할 때 사용하던 넓은 데스크와 의자 뿐 아니라 디킨스 책, 상하이 녹색 카펫, 엄마가 직접 그린 유화, 외가에서 유물로 내려온 은그릇으로 장식했다. 캐롤이 학교에 잘 적응하자 마음 놓고 주말과 휴일엔 픽업해서 시간을 내어 함께 음악도 연주하며 클래식을 즐겼다. 펄은 음악에 재능이 있어 피아노와 오르간을 전문가처럼 연주했다. 목조 천장과 마루바닥의 거실에 위치한 그랜드 피아노와 커다란 오르간이 있고 그녀가 치던 악보가 정겹다. 양녀인 제니스 외에20년에 걸쳐 6명의 아이들을 입양해 함께 시간을 보내고 주말엔 중국 음식을 직접 요리했는데 솜씨가 무척 좋았다고 한다. 그녀는 거기서 ‘미세스 월시’로 통했다. 양자인 에드거는 원래 엄마의 이름도 모르고 자랐는데 하버드 재학 중, 친구가 방문해서 “아니 네 엄마가 펄 벅 여사?” 그제야 알게 됐다고 한다. 그녀는 노벨상과 퓰리처상을 가족 서재에 있는 구석 소파 서랍에 간직했고 겸손해서 이웃에서도 그녀가 유명한 작가라는 사실을 몰랐다고 한다. 가족의 서재 옆에 있던 아이들의 Playroom을 개방하여 도서관으로 탈바꿈해 마을 사람들이 쓰게 하고 책도 빌려주었다. 1942년에 펄과 남편은 동서협회를 설립해서 아시아 학자들을 집으로 초대해서 커뮤니티 사람들과 대화하는 만남의 장소로 사용했다. 특히 혼혈아이들을 백인집에 입양시키는 일은 당시 사회적으로 획기적이었다. Welcome House를 통해50년간 5만6천여 명을 입양하게 도왔다. 리차드는 두번째 중풍이 치명적으로 와서 코마 상태가 되어 1960년 세상을 떠났다. 25년간 결혼생활과 기막힌 팀으로 함께 했던 것에 감사하며 그에게 바치는 책을 썼다.
원래의 스톤 하우스 끝 문에다 겨울에도 춥지 않게 지나다닐 수 있도록 긴 통로를 덧대어 그녀의 작업실과 연결되게 건축했다. 양쪽으로 문을 내어 초원의 맞바람이 드나드는 그곳에서 펄은 어릴 적 중국의 넓은 초원을 떠올리며 누구든지 환영했다고 한다. 아침 8시부터 오후 1시까지 퇴고를 거의 필요하지 않고 정확하게 써서 거의 1년에 두 작품을 내놓을 만큼 왕성한 집필을 했다. 또한 인권운동가로 많은 팜플렛과 글을 썼다. ‘일본침략협조 중단을 위한 미국위원회’를 위한 라디오 대담도 서슴지 않았다. 여성에 대한 차별 부당성을 인식하고 흑인과 유색인종에 대한 인권 유린에 민감했다. 린위탕과 함께 미국 인도연맹 명예회장으로 인도 독립을 주장했다. 1942년, 미국에 거주한 노벨상 수상자들 중에서 절반이 참석한 축하연에서 “제 2차 세계대전이 문명세계를 구하는 전쟁이 아니라 단지 유럽문명을 구하기 위한 전쟁”이라는 용감한 언급을 했다. 루즈벨트 대통령이 되기 전부터 그의 아내와 펄은 각별한 사이였고 중국인 이민 배제법 철폐가 되도록 종용했다. 1962년 펄이 케네디 대통령 옆에 앉아 대화를 나누고 거기에 참석한 <가지 않은 길> 시로 유명한 로버트 프로스트가 중국에 대해 무지한 재클린 옆에 앉아 담소를 나누는 사진이 있다. 그는 노벨상을 받지 못했지만 후보자로 31번이나 올라 초대를 받았는데 “중국에 대한 것만 쓰는 작가가 뭐 대단하냐. 그녀가 노벨상을 받을 정도면 누구나 노벨상을 받을 수 있다”고 폄하했다. 펄은 여자이기에 비판을 받는다는 생각에 필명을 John Sedges로 바꿔 몇 년 후에 중국의 소재가 전혀 없는 <The Angry Wife>, <The Long Love> 등을 써서 세간인들이 펄 벅 스타일 같다는 평을 들으며 제대로 인정을 받게 되었다. 알려진 바와 다르게 자신은 공산주의자가 아닐 뿐 아니라, 여성의 권위와 인권을 주장하지만 페미니스트도 아니라고 밝혔다. 그러나 에드거 후버는 그녀를 공산주의자로 낙인 찍고 거부감을 드러낸 FBI 파일이 수두룩하다. 펄은 일본과 전쟁으로 가난해진 중국인들을 위한 자금을 적극 대어주고 모금운동을 하는 등 인류애적 행동에도 불구하고 반공주의자에겐 비판당하고 중국 문화를 비하했다는 이유로 여전히 정부에서도 미움을 받게 되었다. 1972년 닉슨대통령의 초대로 함께 중국에 가려 했으나 캐나다 대사관을 통해 공식적인 거절의 편지를 받았다. 아픔이 컸을까. 그녀는 폐암으로 그 다음 해에 세상을 떠나게 된다.
펄의 보모 마가 알려준 ‘하늘 아래 우리는 한 가족’이란 불교사상으로, 공 선생에게 배운 <<We are Brothers>>란 중국 철학책을 영어로 번역하고 온몸으로 실천했다. 그녀의 부모에게서 물려받은 크리스찬 측면에서 예수의 이름으로 이 세상 사람들을 몇명이나 구했는가를 묻는다면 그녀는 깊고 푸른 눈을 반짝이며 “제가 생각하고 있는 숫자보다 더 많을 수도 있을 거예요.”라고 대답할 것 같다. 어디 까지가 펄의 대지일까. 이곳에 캐롤이 72세에 세상을 떠날 때까지 함께 정원을 가꾸며 지켜온 여인이 있다. 양녀인 제니스다. 몇 년 전 죽기 전까지 작은 꽃 한포기에도 엄마의 발자취를 구석구석 담은 것 같다. 펄이 결혼 전 까지 쓰던 성, 사이든스트릭커 (Sydenstricker)를 쉽게 중국어로 ‘사이(賽)’ 그리고 Pearl이란 이름을 ‘진주’로 묘비명은 본인이 직접 디자인했다. 펄 벅 보다는 ‘賽진주’로 살고 싶었을까. 그녀의 무덤 주위엔 진주 빛 꽃들이, 뒤로는 대나무숲이 전설을 담은 듯한 동쪽 바람소리를 낸다. 드넓은 푸른 대지에 주인의 미소를 닮은 햇살이 눈부시다.
<한국산문> 6월호, 2022
그 먼 길을 달려 다녀온 열정에 박수를 보냅니다.
얼마전 오렌지 방에서 동네방 합평시에 오느 회원께서
펄벅의 명언을 인용하셨었는데
그 분의 역사를 박진희선생님을 통해
더 깊게 알게 되었습니다.
감사합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