마리아의 초이스

 

박진희

 

 결혼할 남자가 없어.” 검정색 긴 곱슬머리에 초콜릿 피부색의 단정한 여학생이 말문을 열었다. 백인 엄마와 흑인 아버지 사이에 뉴욕에서 태어났다는 20대 중반의 마리아. 1996년 여름, 카네기 멜론 대학원의 한 클래스에서 그녀를 만났다. 화장은 안 하지만 은은한 향기가 나고 자기의 의사가 분명하며 솔직했다.

 

 흑인 남자의 1/3은 이미 남의 차지가 되었고 1/3은 감옥에, 나머지 1/3은 곧 감옥에 갈 사람들이거든.” 이처럼 미국사회를 적나라하게 표현한 말을 들어본 적이 없다. 흑인 남자들이 얼마나 마약거래에 미쳐 있는지 말도 못한다며 공부에는 관심도 없고 마약으로 부자가 될 꿈을 꾸는 그들을 한심스러워 했다. 더구나 백인과의 결혼은 여러 면에서 상상할 수 없단다. 사실 사회에서 성공한 흑인 남자들이 백인여자와 결혼하는 경우가 있지만 그 반대는 무척 드문 것 같다. 마리아는 남동생이 하나 있지만 아버지가 일찍 가족을 떠나서 남자들을 어떻게 대해야 하는지 몰라 연애도 제대로 못했단다.

 자격이 있는 흑인에게는 장학금제도가 잘 되어있다. 그것을 잘 아는 그녀는 장학금으로 살아가야 하기에 공부하느라 바쁘기도 했다. 스페인어가 유창해서 대학을 마치고 남미에서 Peace Corp 봉사활동을 마치고 대학원에 진학했다. 여자의 학벌이 높을수록 결혼 문은 훨씬 좁아진다. 그러나 사회에 기여하고 싶은 소망이 가득한 그녀의 눈은 늘 반짝거렸다. 나는 이미 두 아들을 둔 유부녀에 그녀보다 연상이지만 우리는 곧 친해졌다. 결혼하고 십년 만에 돌아온 학교는 E메일로 소통하며 시험과 숙제도 대체로 컴퓨터로 하는 새로운 장벽에 부딪혔다. 처음엔 두려웠지만 인터넷 시대를 함께 맞았다. 또한 다문화를 포용하는 시대를 예감하며 훈련하는 학과과정에서 그녀가 옆에 있어 이해가 쉬웠다.

 

 우리는 대학원을 졸업하고 24년 동안 손가락을 꼽을 만큼 만났다. 첫번째 해후는 마리아가 유명한 컨설팅 회사에서 한동안 일하다 Peace Corp 임원이 되어 남미로 떠나기 전이었다. 그녀는 30대 중반에도 여전히 꿈 많은 싱글이었고, 난 프리랜서로 웹페이지 디자인 일을 관두고 늦둥이를 낳은 후였다. 달라도 너무 다른 서로의 세계는 흥미롭고 에너지를 채워주는 시간이었다. 난 줄곧 한 도시에서 있었으나 그녀는 남미와 아시아 몇 나라를 오가며 지냈다.       

 마리아는 하이티에서 일하던 중 연하의 똑똑하고 착한 흑인을 만나 사랑에 빠졌다. 사귀면서 마치 평강공주처럼 그가 대학과정을 마치도록 권했다. 결혼 후 남편의 대학원 교육도 물심양면 도왔을 뿐더러 미국시민이 되어 정부기관에서 일하도록 외조를 톡톡히 했다. 쾌활한 남편은 예절도 바르며 친절했다. 그의 둥근 얼굴은 어려 보이고 귀여웠다.

 

 그녀는 방콕에서 신혼이 한참 지나고 나이가 있어서인지 임신이 어렵다며 인공수정도 시도했다. 그러다 아이를 입양하고 싶다고 내게 추천서를 써 달라며 당시에 한국에 있던 나를 찾아왔다. 그래서 마리아는 사랑이 가득차고 오래동안 준비된 엄마로서 자격이 차고 넘친다란 말을 써주었다. 얼마 후 마리아를 닮은 따스한 미소와 큰 눈의 남자아이를 입양하게 됐다. 몇 년 후에 만난 매튜라는 이름을 가진 아들은 말솜씨가 일사천리로 어쩜 그리 마리아와 똑같던지. 페루에 거주하는 동안 아들이 덩치 큰 아이들에게 왕따를 당한다며 어떻게 해야 할 지 내게 자문을 구한 적이 있다. 자세히 생각이 나지 않지만 경험상 안전한 환경을 만들어주는 게 중요하단 말을 해준 것 같다. 그래서인지 마리아는 매튜가 마음 편하게 다닐 수 있는 태국이나 필리핀에 살아가고 있다. 입양한 아이를 위한 그 선택에 가슴이 뭉클하다.

 마리아는 일찍부터 천주교 신자로 하나님이 언젠가는 자녀를 주실 거라는 확신을 갖고 늘 기도해왔다. 그래서 일까. 마흔을 몇 해 넘긴 마리아는 자신의 딸을 낳게 되었다. 옅은 갈색의 피부색을 가진 딸은 눈부시게 아름답다. 그녀는 나를 이모라 부르며 한글로 쓴 자신의 이름이 있는 정성스런 선물을 건네 주었다. 얼마나 사랑스러운지. 미국 정부에서 일하는 덕분에 큰 집에 거주하며, 집안 일을 해주는 도우미를 두고 아이들은 무료로 외국인 학교를 보내는 혜택을 누린다. 그래서 모은 돈으로 여름엔 방학동안 미국에서 본토아이들과 동질감을 갖도록 어울리게 한다. 자녀에게 미국에 있는 백인 할머니와 삼촌가족들을 만나 귀중한 추억을 쌓고 여러가지 경험을 가지게 하는 슬기는 그녀의 것이다.

 

 해외에서 크리스마스마다 보내주는 그녀의 가족 사진을 보며 흐뭇했다. 팬데믹이 시작되고 얼마 되지 않아 마리아의 가족을 만나 감격의 시간을 보낸 후, 2년이 지나 연락이 왔다. 아이들 여름캠프에 보내려고 호텔에 머문다며 얼마 전 만났다. 나이가 들어도 외모가 별로 변하지 않은 모습에 찬사를 늘어놓고 젊은 시절의 싱그런 분위기로 금세 차오른다. 마리아는 남편과 한 동안 이혼까지 갈 정도로 갈등을 겪었지만 화해해서 잘 지낸다고 해서 축하해줬다. 어느 일에서나 원칙에 철저하고 노력하는 태도는 그녀를 더욱 성숙하게 한다.

 마리아와 그녀의 남편은 부모 역할을 하기가 어렵다고 한다. 그 부부가 아버지 없이 자랐기 때문일 거라고 말한다. 어떻게 아이들을 성공적으로 키워야 하는지 내게 묻는다. “넌 지금 최고로 잘 하고 있어. 사랑하고 칭찬해주며 뒷바라지 잘하는데, . 아이들이 건강하고 영어, 스페인어, 불어가 능통한데, 더 바랄 게 있을까?” 그녀는 남편과 함께 제대로 터득했고 실천하는 지혜로운 부모가 확실하다. 입양아들과 친딸에게 공평하게 대하느라 늘 애쓰는 그녀가 대견하다. 난 정말 그럴 자신이 없는데

 

 미국 흑인여인 중에서 정부의 보조금으로 살아가기 위해 십대부터 남편없이 아버지가 다른 아이들을 낳고 살아가는 경우가 흔하다. 30대 후반이면 할머니가 되어버리고 그 굴레에서 벗어나지 못하고 손녀들도 선택의 여지없이 비슷한 삶을 반복한다. 무척 안타까운 현상이다. 거기에 비하면 괜찮은 배우자를 만나기 어렵다고 푸념하던 마리아는 일반적인 삶의 패턴을 깨고도 남는 슈퍼우먼이다. 사회에 기여하며 아내와 엄마로의 삶에도 최선을 다하는 그녀는 충분히 특별하며 소중하다. 한결같이 바르고 굳건한 마리아의 선택을 힘껏 응원한다.

 

 

 <한국산문, 10월호, 2022>