경복궁을 다녀와서 / 이정호

 

  아들과 청와대를 가는 길에 경복궁을 들렸다. 광화문 입구에 가서 표를 받았는데 나는 연장자로 돈을 내지 않았다. 다른 사람들은 한복을 착용하고 방문하면 무료로 입장을 있다. 안으로 들어가니 많은 방문객들로 있었고 외국사람들이 거의 정도를 차지했다. 학교에서 야외학습을 나온 것처럼 보이는 학생들도 보였다. 한복을 입은 사람들이 상당히 많이 있었다. 예전에 경복궁에 왔을 때는 한가 했었는데 이제는 그런 모습이 아니다.

 

  안내를 하면서 설명을 하는 사람들이 가끔씩 보였다. 근정전에 도달해서 근정전의 유래에 대해 설명하고 지붕에 대해 말하는 것이 들렸다.  근정전 지붕을 올려다보세요. 지붕 추녀마루 끝에 여러 동물들이 세워져 있지요. 이들을 잡상이라고 해요. 잡상을 어처구니라고 부르는데 경복궁 하늘을 지키고 있지요. 우리가 사용하는 어처구니가 없다. 말은 건물을 지어놓고 잡상을 깜박 잊어 세우지 않았을 어처구니가 없네. 라고 하는 데서 유래된 말이에요.” 라고 여행 안내원이 말했다. 이곳 근정전 앞마당에서 왕의 즉위식이 이루어졌고 과거시험도 치러졌다. 외국 사신을 맞이하거나 국가 의식이 행해졌다.

 

  경복궁은 태조 4 (1395) 8월 경기좌도의 인부 4,500, 경기우도 인부 5,000,  충청도 인부 5,500명을 징용하면서 건설이 시작되었다. 많은 백성들을 착취하고 그들의 희생으로 완공이 된 것이다. 임진왜란때 전소되고 구한말 흥선 대원군이 왕권을 강화하기 위해 경복궁을 재건한다.

 

  이곳에서 왕자의 난이 일어났고 태종 이방원은 이복 동생 둘을 죽이고 정권을 쟁취하는 길로 가게 된다. 태종은 창경궁을 지어서 주로 그곳에서 기거한다.  근정전의 위용있는 모습과 돌로 깔려 있는 넓은 앞마당을 쳐다보며 권력의 무상함을 느낀다. 그들은 모두 가고 없다. 싸우고, 죽이고, 울고, 웃고 했던 그 모든 사람들은 역사의 바람속으로 사라져갔다. 조선왕조에서 가장 불운한 왕은 누구일까. 그 왕은 단종이 아닐까. 권력의 소용돌이 속에 삼촌 세조에 의해 목숨을 잃어버린 왕이다.

 

  안쪽으로 걸어 들어가니 아름다운 경회루가 나왔다. 아들이 말했다. “이곳은 참 아름다워요.” 잔잔한 연못위에 서있는 누각, 물 주위에 멋있게 늘어져 있는 나무들, 이곳에서 왕들은 연회를 즐기며 사신도 대접했다. 아름다운 음악과 노래, 춤이 있었으리라. 이곳에서 사진도 찍었다. 아들과 같이 자세를 취하며 멋있는 배경을 담아내었다.

 

  경회루를 지나 안 쪽으로 쭉 들어가 건청궁에 도달하였다. 조선 역사상 가장 불운한 왕비 명성황후가 기거했던 곳이다. 이곳에서 왕후가 일본 자객들에 의해 피살되었다. 낭인과 조선인 협력자들은 궁녀를 일일이 확인하여 누가 왕후인지를 색출했고 궁녀의 복장으로 갈아입은 왕후를 찾아 내었다. 낭인들은 궁녀들 사이에 숨었다가 도망치는 명성황후를 쫓아가 그녀를 마룻바닥에 넘어뜨려 내동댕이친 맨발로 계속 밟고 일본군 4명이 칼로 찔러 죽였다. 그 후 그들은 왕후의 시신을 문짝 위에 얹어 이불을 덮고 건청궁 동쪽 녹원 속으로 가져간 다음 장작더미 위에 올려놓고 석유를 뿌려 태웠다고 한다.

 

  조선왕조시대는 불평등의 사회이다. 권력을 가진 자가 다수를 억누르고 그들의 희생을 강요해 왔다. 과학과 경제가 발전하면서 사회구조는 어쩔 없이 민주적인 구조로 발전하지 않을 없게 되었다. 권력에 맞서 싸워온 많은 사람들이 있었다. 그들의 희생이 아름다운 사회를 앞당겼다고 생각한다.

 

  경복궁을 빠져나왔다. 아들이 한국의 역사에 대해 이해하고 있는 기회였을 것이다. 아들 덕분에 경복궁을 구경할 있게 되어서 즐거웠다. 또한 조선의 역사에 대해 공부하며 우리 선조들의 희생이 우리를 여기까지 오게 함을 다시 생각하게 한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