나즉하고 그윽하게 부르는 소리 있어 / 나아가 보니, 아, 나아가 보니 // 이제는 젖빛 구름도 꽃의 입김도 자취 없고 / 다만 비둘기 발목만 붉히는 은실 같은 봄비”

 

내가 좋아하는 수주 변영로의 시 ‘봄비’ 속 한 구절이다. 꽃이 필 만큼만 아주 조금 내리는 봄비가 그려진다. 보고 싶은 누군가가 봄비처럼 찾아오기를 바라는 시인의 마음도 느껴진다.

은으로 짠 실처럼 가느다랗게 빛나는 봄비. 그 고운 비가 냉이 달래 쑥 등 들나물에 단맛으로 스며들었다. 때를 놓칠세라 손맛 좋기로 소문난 ‘아내를 위한 레시피’의 저자 조영학은 들에서 캔 (잎에 붉은 기운이 도는) 냉이에 된장 고추장 들기름을 넣고 무쳐 뭇사람의 침샘을 자극했다.

이맘때 비가 내려 땅이 보드라워지면 농부들은 바빠진다. 가래 써레 쟁기 괭이를 손보고, 논의 못자리판도 둘러본다. 그러곤 논둑을 부지런히 오가며 황금물결 풍년의 꿈에 흠뻑 젖는다. 집 근처에 작은 텃밭이 있는 지인도 경작 본능이 꿈틀대 온몸이 근질거린다고 했다. 봄비가 제 몫을 톡톡히 한 덕이다.

일만 하고 살 순 없는 법. 술꾼들에게 빗소리는 전 부치는 소리로 들린다. 비가 내리기 전 하늘이 끄물끄물하면 막걸리 집으로 하나둘씩 모여드는 이유다. 막 지진 뜨끈하고 바삭한 부침개에 막걸리가 빠질 순 없으니까. 소리연구가 배명진 교수도 잘 달궈진 프라이팬에 밀가루 반죽을 넣을 때 나는 기름 튀는 소리는 처마 끝에서 떨어지는 빗소리와 진폭이나 주파수가 거의 흡사하다고 말한다.

끄물끄물은 비가 오려고 날씨가 몹시 흐려지는 모양이다. 그물그물보다 센 말로 끄물끄물하다, 끄물거리다, 끄무레하다 등으로 활용할 수 있다. 그런데 발음이 비슷해서인지 ‘꾸물꾸물’로 잘못 쓰는 이가 꽤 있다. 꾸물꾸물은 굼뜨고 게으르게 행동하는 모습이다. 바쁜 상황에 느릿느릿 행동하는 사람한테 “왜 그렇게 꾸물거려!” 하고 야단치는 장면을 떠올리면 구분하기 쉽다.

찌뿌드드하다, 찌뿌듯하다, 찌뿌둥하다 역시 비가 올 것처럼 날씨가 궂거나 잔뜩 흐린 모양이다. 날씨가 궂으면 기분도 좀 언짢은데, 그런 감정까지도 안고 있다. 날씨와 감정 둘 다 표현할 수 있는 말이니 쓸 일이 많겠다.

봄비에 화답하듯 꽃이 흐무러져 천지가 꽃물결이다. 꽃과 나비가 정분나기 딱 좋은 때다. 시인 김용택도 밭일을 하다 말고 집을 나갔단다. “나 찾다가 텃밭에 흙 묻은 호미만 있거든 예쁜 여자랑 손잡고 섬진강 봄물을 따라 매화꽃 보러 간 줄 알그라” (김용택, ‘봄날’)