어머니를 위한 여섯 가지 은유
책
이어령
나의 서재에는 수천수만 권의 책이 꽃혀 있다.
그러나 언제나 나에게 있어 진짜 책은 딱 한 권이다
이 한 권의 책, 원형의 책,영원히 다 읽지 못하는 책
그것이 나의 어머니이다.
그것은 비유로서의 책이 아니다. 실제로 활자가 찍히고
손에 들어 펴볼 수도 있고 나면 책꽂이에 꽂아둘 수도
있는 그런 책이다.
나는 글자를 알기 전에 먼저 책을 알았다. 어머니는
내가 잠들기 전 머리맡에서 책을 읽고 계셨고 어느 책들은
소리 내어 읽어주시기도 했다.
특히 감기에 걸려 신열이 높아지는 그런 시간에 어머니는
소설책을 읽어 주신다. 암굴왕,무쇠탈,장발장, 그리고
이제는 이름조차 알 수 없는 이야기들을 나는 아련한 한약
냄새 속에서 들었다. 겨울에는 지붕 위를 지나가는 밤바람
소리를 들으며 여름에는 장맛비 소리를 들으며 나는 어머
니의 하얀 손과 하얀 책의 세계를 방문한다.
어머니와 책의 세계는 꼭 의사가 주사를 놓고 버리고 간
상자갑과 같은 것이었다. 주삿바늘은 늘 나를 두렵게 했지만
그 주사액의 앰풀을 담았던 상자 속의 반짝이는 은박지나
흰 종이솜은 늘 포근하고 아름다웠다. 39도의 높은 신열속
으로 용해해 들어가는 신비한 표음문자들을 나는 지금도
기억한다. 그리고 상상력의 깊은 동굴 속에서 울려오는 신
비한 모음의 울림소리를 듣는다.
조금 자라서 글자를 익히고 스스로 책을 읽게 되고 몽당
연필로 무엇인가 글을 쓰기 시작한 뒤에도 나에게는 언제
나 어머니 손에 들려 있던 책 한 권이 있다. 어머니의 목
소리가 담긴 근원적인 그 책 한 권이 나를 따라다닌다. 그
환상의 책은 60년 동안에 수천수만의 책이 되었고 그 목
소리는 나에게 수십권의 글을 쓰게 했다.
빈약할망정 내가 매일 퍼내 쓸 수 있는 상상력의 우물을
가지고 있다면, 그리고 내가 자음과 모음을 갈라내 그 무게
와 빛을 식별할 줄 아는 언어의 저울을 가지고 있다면 그것
은 오로지 어머니의 목소리로서의 책에서 비롯된 것이다.
어머니는 내 환상의 도서관이었으며 최초의 시요 드라마
였으며 끝나지 않는 길고 긴 이야기책이었다.
이어령 - 어머니를 위한 여섯가지 은유 中