새로 쓰는 수필론

낭송수필과 단수필의 이론과 실제


박  양  근



들어가며


문학이란 작품을 통하여 작가와 독자 간의 정서적 지적 교감을 이루는 소통체계를 말한다. 하지만 인류의 정신적 문화를 집적하고 있는 예술 형태로 인정받아 온 문학의 위치가 흔들리고 있다. 문학의 위기가 거론된 것은 어제오늘의 일이 아니며 작가의 죽음, 정전(正典)의 와해, 의미의 해체 등 한때 충격적이었던 말들이 이제는 진부하게 들릴 정도다. 멀티미디어, 정보화, 세계화, 디지털 혁명 등과 같은 슬로건이 속도전을 연상시켜 주듯 현대사회 속에서 문학은 그 변화의 흐름에 발맞추지 못하고 있다. 문학이 처한 현실을 총체적으로 진단하고 시대 변화를 예견하며, 새로운 발전 방향을 제시하여 삶의 가치를 재확인하라는 문학에 대한 요구는 문학적 이상에 대한 단순한 향수가 아니다.

문학의 기원은 고대부터 시작한다. 문자가 발명되기 이전에 원시인들은 수렵채취의 행위를 음성으로 전달하고 그들의 감정을 말로 표현하였다. 말하기 문학은 원시적이기는 하지만 음성이라는 표현수단으로 감정과 느낌을 전달하는 구전문학의 효시로서 오랫동안 사람들의 정서를 전달하는 수단이었다. 중세에서 근대에 걸쳐 발전되어 온 음유문학이나 구비문학도 역사적 사건, 건국신화, 영웅담 등을 악기의 반주에 맞추어 암송하는 것으로 엄연히 문학의 일부라고 볼 수 있다. 지금도 문자에 생생한 감정과 음악적 음률을 가미하면 문학 본래의 표현력과 소통성이 살아나는 것은 낭송문학의 불변성을 재확인해 준다. 이런 점에서 낭송이야말로 문자언어와 음성언어가 동시에 구사되는 가장 효율적인 문학형식에 해당한다.

글을 쓰는 사람을 작가라고 부르고 글을 읽는 사람을 독자라고 부른다. 하지만 소통을 이루는 수단으로서 말은 글보다 더 원초적이고 직접적이다. 나아가 시간적으로 공간적으로 제약을 받지만 현장성과 즉각성의 효과는 말의 결점을 상쇄하고도 남음이 있다. 작가와 독자를 쓰고 읽는 관계라고 한다면 말하고 듣는 문학에서는 화자(speaker)와 청자(listener)라는 새로운 소통관계가 이루어진다. 여기에 낭송문학이 존재하는 이유가 있다.


낭송문학의 현대적 이론


프린스턴 대학의 명예교수이며 작가인 앨빈 커넌은 ‘문학과 시대 3부작’이라고 불려지는 마지막 저서인 『문학의 죽음』(1990)에서 문학이 처한 위기를 다각도로 탐구하고 있다. 그의 테제는 워즈워스, 괴테, 제임스 조이스, T.S. 엘리엇으로 대표되는 낭만주의와 모더니즘 문학이 죽었다는 것이다. 인쇄 문화와 산업주의의 산물로 간주되어 온 문학의 죽음은 우연이 아니라 정치적 사회적 변화의 일부로서 그 원인 중의 하나로서 텔레비전과 컴퓨터와 같은 테크놀러지를 지적하며 나아가 세기 초의 놀라운 변화 속에서 문학은 과연 옛모습 그대로 존속할 수 있을 것인가에 대하여 심사숙고하게 한다.

문학의 위기를 진단하여 보면 문학이 처한 다양한 스펙트럼이 드러난다. 문학을 본격적으로 탄생시킨 것이면서 문학에 위기를 초래한 전달매체가 있다는 사실이다. 그것은 바로 인쇄매체이다. 사실상 낭만주의와 모더니즘에서 볼 때 문학의 출발점은 인쇄된 서적의 개념이었다.

공교롭게도 활자문학은 우연히 시작되었다. 1450년경 프러시아의 한 조용한 시골마을 대장간에서 구텐베르크는 어느 여름날 오후, 호미와 낫과 같은 농기구를 만들다 남은 쇳물로 놀이 삼아 글자체의 모양을 만들어 보았다. 그 글자체를 이리저리 맞추어 단어와 문장을 만들어 잉크에 묻혀 당시의 파피루스에 찍어내었고, 이를 수십 장, 수백 장씩 찍어서 돌려보기 시작하였다. 문명의 태반이 우연히 이루어졌다는 익살처럼 구텐베르크 혁명이라 일컫는 인쇄술은 중세사회를 무너뜨리고 구전문학, 달리 말하면 낭송문학을 순식간에 침몰시켰다.

하지만 역사가 반복한다면 문학적 표현양식 또한 반복되기 마련이다. 인간에 의해 문명의 성채로 불리던 도서관은 지금은 사창굴이라고 비아냥 받을 정도로 책의 보고(寶庫)는 세속화되어 가고 있다. 호기심을 일으키면 무엇이든 손을 대는 이율배반적인 자본주의 논리가 문학을 상품으로 변질시키고 있으며 이것은 활자문학이 직면할 수밖에 없는 필연적인 현실이기도 하다.

문학이 권위와 신용을 잃기 시작하면서 인쇄서적의 존재 자체를 위협하는 대체매체가 등장하였다. 그것이 전자문자의 출현이다. 전자적 표현양식의 예로서는 영화, 텔레비전, 컴퓨터 화면 등으로 이것이 제공하는 손쉽고 매력적인 오락성은 사람의 읽고 쓰는 능력을 저하시키고 있다. 비록 지식의 원천으로서 인쇄 서적이 여전히 중시되고 있지만 문학적 도구로서 제 역할을 하고 있는가에 의문을 가지게 된다. 이러한 사실은 캐나다 에드먼턴 출신으로서 미디어 이론가인 마샬 맥루한(Marshall Mcluhan)이 역사를 전달매체의 발달 단계에 따라 구어 시대, 문자 인쇄 시대, 전자매체 시대로 나눈 방법과 일치한다. 이러한 구분에 따르면, 전자매체가 현대문학의 중심적 양식으로 자리잡는다는 시대적 흐름은 불가피하다고 하겠다.

이러한 전제하에서 앨빈 커넌은 미국 대학과 사회를 예로 들어 문학의 형식적 변화를 예고하고 있다. 미국 성인 대다수가 일 년에 한 권의 책도 읽지 않으며, 문화교양 수준이 현저하게 떨어질 뿐만 아니라 표절과 외설 시비에서부터 저명작가의 사생활에 이르기까지 문학이 스캔들이 되면서 활자문학의 위상을 저하시킨다는 것이다. 이러한 문학을 구하는 방안으로서 책의 시대가 전자 시대에 자리를 양보하고 있지만 작가는 여전히 두 가지 정보 전달 방식을 사용해야 한다면 말의 전달효과를 존중하고 발전시켜 나가야 한다는 것이다.

마샬 맥루한은 “미디어는 이미지”라고 한 바가 있다. 미디어로서 말과 글과 전자문자는 모두 인간이 지닌 재능을 심리적, 물리적으로 확장한다. 나아가 그는 「미디어의 이해」에서 미디어를 핫(hot)미디어와 쿨(cool)미디어로 구분하여 귀의 세계는 뜨겁고 주술적인 세계인 반면에 눈의 세계는 상대적으로 냉정하고 중립적인 세계로 설명하고 있다. 도구를 만들고 사용하는 인간은 말하기든 글쓰기든 간에 감각기관 가운데 어떤 하나를 사용하면서 다른 감각이나 기능을 소홀히 여겨 왔다. 사실 구텐베르크가 고안한 활자표기는 그 이전까지 사용해 오던 말하고 듣는 입과 귀의 기능을 위축시켰으며 청각이 오감의 감각 가운데서 차지하는 비율을 바꾸어 버렸다. 문명은 인간에게 귀 대신 눈을 중요하게 만들었고, 나아가 오늘의 문명을 전자적인 것으로 만들었다고 하겠다.

맥루한은 나아가 지금까지의 핫과 쿨과의 이분법을 수정하여 한 가지 감각에만 의존하는 매체를 ‘핫미디어’라고 규정한다. 핫미디어란 라디오나 신문처럼 한 가지 감각에만 의존하여 청취자나 관객의 참여도를 떨어뜨리는 일원적 미디어를 뜻하며, 쿨미디어는 텔레비전처럼 여러 감각을 동시에 활용하여 인식과 감동의 지수를 높일 수 있게 하는 다원적 성격의 미디어로 구분하고 있다. 맥루한의 기본 전제가 인간의 오감 중에서 ‘시각’의 독점화를 경계하는 것인 만큼 보고 듣는 쿨미디어인 텔레비전의 소통효과가 새삼 강조되는 것이다. 좀더 쉽게 설명하자면 핫미디어가 주입식 전달도구라면 쿨미디어는 반응을 확장하려는 소통수단이라고 말할 수 있다. 이제 낭송문학으로 되돌아가기로 한다. 무엇보다 낭송문학은 대중문학의 속성을 지니고 있으며 이러한 속성은 포스트모더니즘적인 현대성에 일치한다.

낭송문학은 구비문학으로서 민중성을 지닌다. 활자문학을 독점하고 있는 소수의 지식인과 지배층을 제외하면 절대다수의 대중은 일상생활을 통해서 구비문학을 창조하고 즐겨 왔다. 노동을 하면서 노동요를 부르고, 세시풍속의 하나로서 마당극을 공연하며, 생활을 윤택하게 하는 민요를 부르고 설화도 지었다. 나아가 민중문학으로서 낭송문학은 지배층에 대한 비판과 동시에 민중 자신의 의식을 충실히 반영하려 하였다. 물론 지배층이나 지식층이 향유한 낭송문학이 없는 것은 아니지만 구비문학과 낭송문학은 대다수 민중이 공유할 수 있는 놀이로서 인간적 감정을 표현한다는 점에서 보면 주술성과 함께 문학성을 지닌다.

낭송문학의 민중성과 구비(口碑)성을 맥루한의 미디어론에 따르면 쿨한 미디어이다. 쿨미디어로서 낭송은 감동성을 육화하고 이미지화하는 데 기여한다. 문학을 사랑하고 문학에 대하여 관심과 열정을 지닌 사람들이 모여 자신들의 시, 수필, 콩트 등의 작품을 청중 앞에서 직접 낭송함으로써 시각에만 작용하는 언어의 한계를 극복하고 청자에게 오감을 통한 문학 수유를 원활하게 함으로써 생기와 활력을 증가시키는 것이다. 미디어는 메시지이니까 문제는 낭송문학은 사람들로 하여금 미디어를 더 ‘촉각적’으로 대할 수 있게 하는가의 여부이다. 맥루한에 따르면 ‘촉각적’이라거나 ‘접촉’이라는 뜻은 피부에 닿는다는 의미가 아니라, 여러 감각이 상호작용하여 마주치는 수용상태를 말한다. 다시 말해, 촉각적이라 함은 여러 감각이 동원되어 문학적 대상에 접촉하는 것을 의미한다.

마찬가지로 사람들이 낭송을 듣고 음미하면 문학적 가치를 공유하는 기쁨을 느끼는 수용력이 증가하고 나아가 효율성도 제고할 수 있다는 점에서 낭송문학은 활자문학 이전으로 회귀하는 것이 아니라 21세기의 디지털문화와 미디어문학에 능동적으로 부응하는 문학 양식이 된다.

이처럼 낭송문학은 읽거나 보는 문학에 비해 보다 적극적인 문학 감상법이다. 눈으로 읽는 이해에 그치지 않고, 눈으로 보면서 입으로는 낭송하고 귀로 듣는 입체적 감상법은 인체의 오관(눈, 귀, 혀, 코, 피부)과 오감(시각, 청각, 미각, 후각, 촉각)을 동시에 활용함으로써 문학적 감수성을 극대화한다. 그러면 낭송자 자신뿐만 아니라 낭송을 듣는 청자의 오관과 오감이 열려지면서 일체감을 생성시키게 된다. 작품을 낭송하여 자신의 작품세계를 보다 생동감 있게 전달하는 것이 낭송문학의 역할인 것이다.

최근 문학매체의 변화와 사이버 문학의 번성을 살펴보면 미래 문학은 지금과 매우 다른 모습으로 발전하리라 기대된다. 앞으로는 그림, 동영상의 기능을 결합시킨 새로운 형태의 전자 북이 등장하고 시나 소설처럼 청자가 문학 소비자가 되어 ‘읽는 수필‘보다는 ‘듣는 수필‘을 선호하면서 낭송문학에 맞는 주제와 형식에 대한 연구가 필요해질 것이다. 어쩌면 문학은 이미 활자 중심의 상상력에서 벗어나 영상적, 음성적 상상력까지 아우르는 존재방식으로 발전하고 있다고 여겨진다.


낭송수필의 문학적 요건


지금까지 낭송문학으로 가장 널리 이용되어 온 장르는 시라고 할 수 있다. 분량이 짧고 운율 형식의 행과 연으로 이루어진 시는 낭송이라는 음악성에 효과적이다. 게다가 시의 비유법과 압축된 어절과 문장, 이미지와 연상은 낭송에 적합한 많은 장점을 지닌다.

시뿐만 아니라 고대소설이나 영웅담, 희곡 중에는 구전되어 오는 작품이 무수히 많으며 전설, 민담, 설화는 대부분이 구전문학의 형식을 지니고 있다고 하여도 과언이 아니다. 구전산문의 특징을 요약하면 서사성이다. 때와 장소라는 배경 외에 주인공이 등장하여 행동을 펼쳐 가는 서사성은 수필을 낭송할 경우 어떤 수필이 낭송으로 적합한가를 판단하는 좌표가 되기도 한다.

산문 중에서 수필은 낭송문학으로서 많은 장점을 지니고 있다. 수필의 특성은 분량이 적으면서도 작가의 체험을 바탕으로 한 사실성이 돋보이는 데 있다. 수필문장은 작가의 사상과 감정, 의견과 생각을 압축하면서 시에 못지않은 치밀한 구성과 함축적인 언어로 표현된다. 뿐만 아니라 번득이는 재치와 유머, 잘 갈무리된 문장과 단락, 신선한 표현, 그리고 독자의 감동과 호응을 얻을 수 있는 기승전결을 가지고 있다.

이러한 요건을 지니고 있는 수필은 읽는 문학으로서 청중의 관심과 호응에 적합하다. 시는 상징성과 압축성이 지나치게 강하고 내용의 비약이 많아 듣기에 난해한 경우가 적지 않다. 게다가 언어의 축약과 생략 및 비문법적 표현이 많아 즉시 이해하기 어렵고 독자의 청각 능력에 부적합한 경우가 많다. 하지만 수필은 논리적인 문장구조와 설득력 있는 주제를 지닌다는 점에서 시보다도 훨씬 쉽게 이해할 수 있다. 이러한 낭송이나 낭독의 장점은 수필의 문학적 잠재력과 상호 일치한다고 말할 수 있다.

무엇보다 낭송문학으로서 수필이 갖는 장점은 체험성이다. 수필에서는 소설과 달리 허구가 용납되지 않는다. 수필이 허구가 아니고 체험을 기반으로 한다는 점은 수필의 내용과 소재가 일상적인 삶에서 본뜬 것이며, 누구에게나 있을 수 있다는 체험의 공유의식을 재확인해 준다. 작가와 독자, 즉 화자와 청자라는 낭송자와 청자 간에 작품에 대한 이해도 가능해진다. 청중에게 진실의 일체감과 공감을 안겨주는 요소를 갖춘 것은 시와 소설이 아니라 수필임을 수필 낭송자는 지각할 필요가 있다는 뜻이다. 수필은 어느 장르보다 친화력과 친밀도가 높은 문학이므로 글로 쓸 때 이상으로 음성으로 낭송될 때의 소통효과는 배가되기 때문에 낭송수필의 창작과 낭송의 경우 문자로 표현된 수필의 경우보다 청중을 더욱 의식할 필요가 생긴다.

낭송수필의 창작에는 두 가지 방법이 있다. 첫째는 15매 내외로 씌어진 기존 수필을 초벌로 삼아 낭송에 맞게 양적으로, 운율적으로 일부를 수정하는 것이다. 언어에는 구어와 문어가 있으므로 읽기 위한 수필에는 주로 문어가 사용된다. 그러므로 낭송을 하려면 읽기 쉽고 듣기 쉽도록 발성에 알맞은 구어(口語)로 적절하게 고칠 필요가 있다.

두 번째는 처음부터 낭송용 수필을 창작하는 것이다. 이 경우에는 글을 쓰기 시작할 때부터 시적인 운율을 생각하면서 쓰기 때문에 낭송에 훨씬 적합한 작품을 쓸 수 있다. 듣기 쉬운 표현, 명료한 줄거리, 인상 깊은 이미지, 음성학적 장단과 고저를 동시에 고려함으로써 작가의 표현 욕구를 충족시키고 독자와의 감동과 공감을 높여 소통을 활성화하는 창작방식이다. 자신이 창작한 작품을 청중 앞에서 낭송한다면 글을 쓰고 읽는 이중적 창작이 되기 때문에 창조적 희열은 더욱 커지기 마련이다.

원작을 줄이든, 낭송수필을 쓰든 항상 주의할 점은 청자의 주의력을 고려하는 일이다. 흔히 청자가 주의력과 집중력을 유지할 수 있는 시간은 3분 정도라고 한다. 이것은 아무리 흥미로운 이야기일지라도 3분이 경과하면 청자의 주의력과 집중력이 산만해지면서 정적 감동과 지적 공감의 도수가 저하된다는 의미이다. 그러므로 수필낭송에서 가장 적정한 분량은 원고지 5매 정도이며 1,000자 내외의 단수필이 수필낭송으로서 적합하게 된다. 만일 낭송에 맞게 3분 수필, 혹은 5매 수필의 낭송수필을 창작하여 낭송한다면 시보다 전달력과 호소력에서 더욱 좋은 효과를 거둘 수 있을 것이다.


미니문학의 시대적 요청


뉴밀레니엄을 맞이하면서 태동하는 새로운 글쓰기 양식은 ‘미니문학’이다. 미니문학은 월드 와이드 웹(WWW)과 디지털 문화의 소산에 해당한다.

오늘날 디지털 문화의 특징 중의 하나는 압축과 응축이다. 20세기 전반기에는 실존주의 시대를 대표한 실존주의 문학이 철학과 결합하였다. 현대 문명과 동반관계를 이루는 문학적 양식이 출현하는 현상은 너무나 당연하듯이 과학정보시대의 혼성은 문학과 과학의 맞춤이라고 말할 수 있다. 특히 홈페이지와 블로그[blog : 웹(web)의 b와 일지, 기록의 의미를 지닌 log의 합성어로, 쉽고 편하게 꾸밀 수 있는 나만의 온라인 공간]의 스타일에 맞게 모든 문학양식이 갈수록 짧아지고 있다. 이처럼 인터넷 문화 양식으로서 미니문학은 가장 두드러진 문화현상으로 매김하고 있다.

하지만 미니문학은 단순히 짧은 글이 아니다. 미니문학은 평면적이고 1차원적이고 2분법적인 원고지 글쓰기에서 벗어나 입체적이고, 다차원적이고 복합적인 화면 글쓰기로 전환한다. 동시에 시청(Audio­Visual)이라는 시각과 청각의 결합을 전제로 한다.

미니문학에 대한 이론적 근거는 기호학이 보여 주는 이미지에 있다.

이탈리아 기호학자이며 철학자이며 작가인 움베르토 에코는 “미니픽션은 한 장의 사진이다.”라고 하였다. 그는 덧붙여 “20세기의 위대한 두 작가가 우리에게 밀레니엄의 비전을 보여 주고 떠났다. 영국의 현대소설가인 제임스 조이스는 언어로써 월드 와이드 웹(WWW)의 시각적 이미지를 보여 주었고, 아르헨티나 태생의 시인이며 소설가인 호르헤 루이스 보르헤스는 그 이미지를 표현하는 아이디어를 제시하고 디자인하였다.”라고 하였다.

이러한 밀레니엄의 비전과 디자인을 바탕으로 지금까지의 소설과 시와 수필과 드라마의 대안으로 등장한 장르가 소설에서는 미니픽션, 시에선 행시(行詩), 수필에서는 단(短)수필, 드라마에서는 장(章)연극이며 행위예술에서는 플래시 몹(Flash Mob : 인터넷을 통해 만난 사람들이 도심 번화가에 모여 리더의 지시에 따라 동시에 소리를 지르거나 동물 흉내를 내다가 순식간에 사라지는 집단 해프닝)이 해당한다고 하겠다. 이러한 문학적 현상은 15분 이상을 참지 못하는 ‘쿼터리즘 세대’와 ‘복수감각형 세대’가 등장하면서 독서세대와 복수감각형 세대가 동시에 존재하는 디지털문화시대에서는 불가피할지도 모른다.


단수필(낭송수필)의 창작 원리


기존의 수필이 유화, 혹은 수채화라면 단수필은 한 장의 그림엽서다. 단수필은 5매 수필, 미니수필, 짧은 수필, 혹은 ‘장(掌)수필‘로 불려지고 있지만 명칭이 무엇이든 짧기만 한 수필이 아니다. 문학적 본질에서 단수필은 일반수필이나 장(長)수필과 다르고, 다를 수밖에 없다. 단수필은 주제를 더욱 압축하고 응축시켜 강렬한 이미지 외에 인상적인 영감(靈感 :  Inspiration)과 깊이 있는 영성(靈性 : Spirituality)을 바탕으로 하는 소통력을 담아야 한다.

그러면 단수필을 창작할 때 유념할 사항은 무엇인가.

첫째, 내용을 압축한다. 서술의 경제성을 살리려면 분위기를 조성하는 서두를 생략하면서 단숨에 전개부로 들어가고, 가장 적절한 한 가지의 에피소드나 사례를 통해 분량을 경제화한다. 불필요하게 긴 여러 예문을 도입하는 확장의 방식은 피하도록 한다.

둘째, 주제가 명료하고 참신하여야 한다. 일상적인 서술은 독자의 인식을 일깨울 여력을 가지지 못한다. 기발한 착상과 역사고, 낯선 관점이 신성한 주제를 불러일으키며 독자의 인식력을 고조시켜 나간다.

셋째, 서정성을 가미하려면 수식어가 아니라 서사로써 서정미를 살린다. 행동은 의미를 형상화할 수 있으므로 서정보다는 서사적 구도가 단수필의 주제를 확보하는 데 더욱 적합하다.

넷째, 치밀한 구성이 요구된다. 구성을 잘 짜야 전달력에서 최대의 효과를 거둘 수 있다. 단수필에서 가장 적절한 구성은 기승전결이라는 4단구성이며 반전이 가미되면 메시지가 입체화된다.

다섯째, 시적 기법의 차용이다. 단수필이 낭송수필이 되려면 음악적 효과를 고려하여야 한다. 우리말에는 장단이 있으나 고저와 강약이 상대적으로 미약하여 낭송 언어로서는 약점을 지닌다. 이 점을 의식적으로 고려하면서 낭독을 하여야 정서적 공유에서 무리가 없다.

여섯째, 낭송수필이 음악성을 지닐지라도 산문정신을 유지해야 한다. 단수필을 낭송할 경우 양적으로 짧다고 하여도 시적인 분위기보다는 산문다워야 한다. 소재, 주제, 문체에서 산문정신이 지켜질 때 시의 아류로서 단수필이 아니라 수필로서 낭송수필의 본질이 지켜질 것이다.

단수필은 짧다는 점에서 주제 전달이 용이하고, 구성의 묘미가 돋보인다. 속도성, 열독성, 경쾌성은 현대독자들의 가독성이라는 조건에 부응할 수 있다. 압축된 기법으로 주제를 펼쳐내는 응축은 수필의 본질을 강화시킬 수 있다. 그렇다고 하여 압축은 내용이 빈약해진다는 불안감을 야기할 수 있으므로 주의하여야 한다.

단수필과 낭송수필의 가장 필요한 것은 무엇보다 응용 기법의 다양화라고 하겠다. 현재 수필에서 사용되는 시적, 소설적 기법 외에 드라마적 기법이나 시네마적 기법은 디지털시대의 문학적 특성 중의 하나로서 인상주의적 묘사에 해당한다. 현대수필은 설명보다는 이미지를 제시하여 현현(顯現)이 이루어지도록 할 필요가 있다.

요약하면 낭송수필은 월드 와이드 웹(WWW)과 시청각(AV) 소통과 디지털 문화에 능동적으로 부응하는 장르라 하겠다.


효율적인 수필낭송법


1) 온몸의 연기로 내용을 전달한다.

인간은 문자가 발명되지 않았던 시대에도 자신의 느낌이나 감동을 음성과 몸짓으로 표현해 왔다. 문학작품 낭송자는 작품을 나름대로 해석하고 소화하여 손짓, 발걸음과 같은 간단한 제스처와 눈빛이나 목소리로 연기해 나간다. 그리하여 독자들이 미처 깨닫지 못한 문학적 가치를 재발견하고 더 깊은 감동을 전달받을 수 있게 한다.


2) 문학작품에 생기를 불어넣어야 한다.

문학은 원시가무에서 출발한다. 원시종합예술은 분화하여 몸짓은 무용과 연극으로, 소리는 음악으로, 노래 가사는 구비문학의 단계를 거쳐 문자 발생 이후 기록문학으로 정착되었다. 이처럼 문학은 속성상 재현이 아니라 표현이다. 낭송자의 목소리로 작품이 지닌 내면의 의미를 밝혀내는 적극적인 표현 방법 중의 하나가 문학 낭송이다. 눈으로 읽기보다 문자언어에 갇혀 있던 작가의 의견과 감정이 음성으로 표현되면 더 깊은 정감을 불러일으킬 수 있는 것이다.


3) 언어는 쉽고 전달력이 있어야 한다.

낭송의 전달수단은 언어이다. 낭송수필에 사용되는 언어가 논리적 비약을 가져오거나 상징성과 함축성이 지나치면 듣기 어렵게 된다. 한자어와 외래어가 빈번히 사용되고, 추상적인 내용이 나열되는 경우 빠르게 낭송하거나 발음이 부정확하면 잘못 이해될 수 있다. 그래서 낭송수필은 가능한 쉬운 언어를 선택하는 것이 바람직하다.

낭송을 할 때는 천천히, 그리고 또렷한 발음으로 읽는 것이 중요하다. 상징이나 다의적인 의미로 해석될 수 있는 단어를 낭송할 때에는 속도와 강약에 더욱 주의를 기울여야 한다. 작품의 내용이 청중의 수준에 비해 어렵거나 난해하면 좀더 천천히 또박또박 낭송하는 것이 좋다. 그러면서 책을 읽듯이 똑같은 어조로 읽어서는 안 된다. 적당한 시간차, 감정의 이입과 호흡의 적절한 조절, 시적인 운율과 리듬 이 어울린 효과적인 낭송이 되도록 사전에 충분히 연습해야 한다.


4) 작품과 낭송자는 일체가 되어야 한다

수필이 지닌 묘미, 재미, 위트와 풍자 등이 잘 전달되려면 배우와 같은 발성이 필요하다. 언어의 강약과 높낮이, 문장과 문장 사이의 간격, 단락과 단락 간의 휴지(休止), 적당한 여운, 표정의 변화와 적절한 제스처, 호흡 등을 고려하면서 낭송해야 한다. 기계적으로 읽거나 꼿꼿이 서서 낭송하면 자세가 어색해진다. 글의 흐름에 따라 몸을 약간 이동하거나 시선을 움직이면 청자들의 지루함을 줄일 수 있다.

좀더 구체적으로 짚어 보면 다음과 같다.


(1) 중요한 대목이나 단어 등을 낭송할 때에는 좀 큰 목소리와 또렷한 어조로 낭송한다. 그리고 강조하고자 하는 구절이나 단어 앞뒤에 침묵이나 공백을 두어 말의 간격을 잘 조절하도록 한다.


(2) 조금씩 목소리의 톤을 높이고 감정을 조금씩 고조시켜 청중들의 마음을 끌어당겨 절정에 이르도록 하는 것이 좋다. 반대로 크고 빠른 목소리로 계속해 나가다가 갑자기 어조를 바꾸거나 낙하시켜 작고 느린 목소리로 낭송해도 주의를 집중시키는 데 효과적이다.


(3) 중수필은 목소리가 장중하면서도 신뢰감이 있게 또박또박 낭송하는 것이 좋으며 표정이나 제스처에서 위엄을 보여 주는 것이 바람직하다. 반면 감성적이고 사색적인 경수필에서는 차분한 어조와 사색적인 표정을 지어 보이고 위트와 유머가 담긴 부분에서는 밝은 표정과 명랑한 어조가 필요하다.


(4) 낭송은 연기여야 한다.

낭송자는 무엇보다 작품의 분위기와 일체되어야 한다. 작품적 배경, 작가의 생애, 작품에 대한 여러 가지 비평이나 견해 등도 사전에 충분히 알아 둘 필요가 있다.

설득력 있는 낭송이 되려면 작품이 몸에 배어나야 한다. 나아가 작품을 외우도록 한다. 암송하면 작품에 대한 성실함과 신뢰성을 보여 주어 청중의 호감을 얻게 된다. 가급적 청중에게 시선을 떼지 않고 그들의 눈을 통해 심리적 반응을 읽으며 몸짓과 손짓 등의 시각적인 제스처를 거듭 연습하여 완전히 익히도록 해야 한다.


(5) 주위환경에 익숙하여야 한다.

청중이 많거나 트인 장소나 날이 어둡거나 실내가 어두운 곳, 약간의 소음이 있는 곳에서는 제스처를 크게 하고 목소리도 다소 높여야 하며 청중의 수가 적거나 좁은 곳과 밝은 곳에서는 목소리를 너무 크게 하지 않고 제스처도 너무 크게 하지 않는다.


(6) 옷차림

낭송에 어울리는 옷차림은 중요하다. 낭송 내용에 어울리는 옷차림이 중요하며 외모와 옷차림에 따라 풍기는 인상도 달라지므로 개성 있고 멋있는 자기 연출이 필요하다. 그러나 짙은 단색이나 요란한 무늬의 복장이나 지나치게 번쩍거리는 장식품은 피하는 게 좋다. 왜냐하면 그러한 의상은 청중들의 시선을 방해하며 집중력을 떨어뜨리기 때문이다.


(7) 목소리

글이 사람의 성품을 나타내듯이 목소리에서는 인품, 지식 수준, 교양, 가치관이나 지적 능력, 인간미 등이 묻어 나온다. 음성은 타고나지만 꾸준한 노력과 훈련을 통해 좋은 음질로 발전시킬 수 있으므로 흡연, 음식, 고함을 평소에 절제하고 사투리는 삼가는 게 좋다. 작품의 분위기에 맞추어 말의 억양이나 말투, 말의 높낮이, 말의 간격이나 여운 등 표출 방법 등을 다양하게 구사할 수 있도록 노력한다.

낭송은 목소리의 연출이기도 하다.


닫으며


문학은 언어예술이다. 그리고 언어는 말과 글이라는 두 가지 표현양식을 모두 포함한다. 작가가 외부세계를 소재로 하여 개성 있는 방식으로 발표함으로써 자신을 구원하고 세계를 구제할 것을 목표로 한다면 말로 표현하는 것도 언어이며, 문자를 통해 생각이나 감정 등을 표현하는 것도 언어임은 의문의 여지가 없다. 낭송문학은 음성언어와 문자언어를 모두 사용하여 생각이나 감정을 동시에 표현하기 때문에 문자와 음성의 복합문학이라고 할 수 있다. 그러기 때문에 낭송은 보고 듣고 느끼고 체험한 것과 그것들에 대한 작가의 사상이나 감정이 자연스럽게 표출되어야 한다. 물론 진실하고 솔직한 태도로써 내용을 전달하려는 문학과 예술의 자세를 전제로 한다는 점은 말할 필요가 없다.

낭송회는 낭송을 하고 들으면서 느낀 점을 이야기하거나 비평하는 가운데 서로간의 친목을 도모하고 낭송 능력을 향상시키며 아울러 작품의 질적 수준도 기대하는 문학발표회이다. 문학작품을 직접 들으며 감상하는 가운데 그 작품의 가치를 보다 명확히 이해하기 위해서는 낭송문학이 풍요로운 정신적 삶을 전달하고 자아를 성숙시키는 의미 있는 문학 활동으로 발전하도록 최선을 다하여야 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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