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 삶의 안테나 역할, 그것은 문학의 숙명이다

                                                                                               최명숙

 

1. 삶의 안테나 역할, 선지자가 되어야 한다

 

문학은 사람과 사람의 삶에 대한 이야기이다. 그 이야기를 글로 표현하기 전에 그 사람과 사람의 삶에 대한 진지한 탐구를 해야 한다. 누구보다 먼저 현실을 읽어 내고 그것을 전달하는 역할 즉 삶의 안테나와 같은 역할을 하는 것은 문학이며, 문학으로 표현하는 것은 작가가 할 일이다. 그 숙명적인 일에 깊이 들어가는 길이 무엇일까.

앞의 일을 먼저 보는 사람이 선지자이다. 말 그대로 선지자는 남보다 먼저 깨달아 아는 사람이다. 그렇다면 세상을 향해 촉수가 발달되어 있어야 한다. 작가가 가지고 있는 것 중에 일반인과 남다른 것이 있다면 바로 그 발달된 촉수로 세상을 바라보고 문제의식을 읽어낼 수 있는 예민함이다. 그 예민함을 발현시켜 인간 삶의 애환을 먼저 보고 정확하게 읽어내야 한다.

방송국에서 송출하는 텔레비전의 전파를 가장 먼저 받는 것은 안테나이다. 보이지 않는 전파를 받아 집안으로 보내는 역할을 하는 것이다. 그 역할을 문학이 해야 한다고 생각한다. 예전에는 방송국에서 보내는 전파를 받기 위해 지붕 위에 안테나를 높이 세웠다. 안테나의 위치가 정확하지 않으면 텔레비전이 선명하게 나오지 않아, 그것을 맞추기 위해 애를 썼다.

문학에 있어서 삶의 안테나 역할이라는 것은, 인간이 안고 있는 삶의 문제를 먼저 깨달아 알아야 한다는 것이다. 작가는 그래야 한다. 인간이 안고 있는 문제들을, 거시적으로 또는 미시적으로 봐야 하고, 통시적으로 공시적으로 봐야 한다. 인간의 삶을 두루 섭렵해 알아야 한다. 그러기 위해서는 삶에 대한 깊은 연구, 인간에 대한 심도 있는 탐구가 필요하다.

먼저 보기 위해서 고요히 혼자 있는 시간이 있어야 한다. 안테나는 혼자 서 있다. 바람과 눈비를 맞으며 외롭게 서 있다. 그 외로움을 안테나처럼 사명감을 가지고 견뎌야 한다. 왜곡되지 않고 정확하게 현실을 보기 위해서 마음에 사심이 없어야 한다. 편견이 없어야 한다는 말이다. 중요한 것은 이것이 힘들지만 의미 있는 일이라는 것이다.

번잡하기 이를 데 없는 현실 속에서 고요한 시간을 요구하는 것이 무리일지도 모르겠다. 날마다 복잡해지고 편리해지기만 하는 세상 속에서 삶의 안테나가 되어 높은 곳에 이상을 두고 현실의 문제를 탐색하고 인간의 삶에 관심을 기울인다는 것, 쉽지 않은 일이다. 그러나 그것 또한 문학의 숙명이라면 순응할 수밖에 없는 것이다.

 

2. 삶의 안테나 역할, 제사장이 되어야 한다

 

남보다 먼저 깨달아 아는 자에게 사명이 있다. 그것은 제사장의 역할을 해야 하는 것이다. 제사장은 대중을 대신하여 신에게 제사를 지내는 역할 뿐 아니라 인간 사회에서 일어나는 일에 대한 판단을 하고 처리하는 일을 했다. 오늘날 이 일을 문학이 해야 한다고 생각한다. 먼저 사회 문제를 진단하고, 인간의 애환을 알았다면, 그것을 세상에 고하고, 그 일을 판단하고 문제 해결의 열쇠를 제시해야 하는 것이다. 이것이 제사장의 역할이 아니고 무엇이겠는가.

현실세계에서 일어나는 부조리하고 불합리한 일, 인간의 삶 속에서 일어나는 숱한 문제들에 예민한 촉수를 들이대고 관찰하여, 문제의 원인을 발견해야 한다. 문학은 그러한 것들을 밝히고 드러내고자 하는 성격을 가지고 있다. 그 이유는 병폐적인 것 또는 문제적인 것은 드러내 치유하여 건전한 사회를 만들고자 하는 것 때문이지 않을까. 삶의 세세한 부분에 숨어 있는 불의한 것들을 드러내는 문학 행위는 그래서 숭고하다. 그 뿐 아니라 그것을 드러내 대신 고하는 역할을 하는 것은 문학의 숙명이기도하다.

그러기 위해서 제사장의 역할을 하는 자는 인간의 삶을 성찰해야 한다. 인생이라는 깊은 바다 속에 생각의 추를 드리우고 그 안을 헤집어봐야 한다. 그 작업은 긴 시간을 요구하는 일이며, 섬세한 관찰을 요구하는 일이다. 그리고 바른 판단을 할 수 있는 깊은 혜안이 요구되는 일이기도 하다. 오판이 있어서 안 되고, 편협 되어서도 안 된다. 삶의 예각적인 면과 어두운 면을 모두 읽어내야 하는 일이다. 겉만 보고 알 수 없는 숨겨진 그리고 사소한 것들의 문제와 의미를 읽어내야 하는 일이다.

그 후에는 그 안에 있는 대중의 울음을 대신 울어주고, 하고자 하는 말을 대신 해주어야 한다. 대중의 죄를 대신 말하고, 그것을 교정해야 한다. 문학의 이름으로, 그 한 사람 한 사람을 대신하여. 인간의 삶과 인간 그 자체에 애정을 가지고 접근해야 한다. 그럴 때 문학작품에 휴머니티가 들어있게 된다. 휴머니티가 없는 문학을 문학이라고 말하기는 어렵다고 생각한다. 이쯤 되면 문학의 역할이 얼마나 방대한 것이며 경건한 것인지 알 수 있다. 그 중심에 있는 게 제사장 역할을 하는 문학이면서 작가인 것이다.

문학이 선지자와 제사장 역할을 제대로 감당할 때, 현실세계는 우리가 꿈꾸는 이상적 세계가 될 것이다. 이상적인 세계라는 것은 불의한 것이 사라지고 병폐와 문제가 사라진 유토피아 같은 곳이다. 그것을 문학은 꿈꾼다고 생각한다. 요원한 일이기는 하겠지만 말이다. 그렇기 때문에 문학을 낭만적이라고 말하는 것인지도 모르겠다. 현실에 바탕을 두고 있으나 현실 너머에 있는 이상을 바라보는 게 문학이라고 생각할 때 말이다. 그럼에도 그 이상을 포기하지 않는 게 문학이고 작가이지 않을까.

 

 

3. 문학의 숙명에 순응하자

 

작가에게 왜 글을 쓰느냐고 물었을 때 대부분의 작가는 종교는 영혼을 구원하지만 글쓰기는 정신을 구원하기 때문이라고 말한단다. 현실의 문제를 탐색하고 인간을 탐구하여, 그 안에서 일어나는 삶의 모습을 작가만의 독창적 시각으로 바라보고 그려낸다. 그것에 대하여 쓰지 않고 배길 수 없는 열정과 사명감이 작가에게 요구된다. 그리고 작가는 그것에 순응한다. 그것이 지난한 일이라 하더라도 끊임없이 쓰는 것, 그거야말로 문학의 숙명에 순응하는 것이 되지 않을까.

문학의 본질에 대하여 연구자들마다 조금씩 다르게 이야기를 한다. 그러나 공통분모는 있다. 문학은 현실세계를 모방 또는 반영하며, 작가의 사상과 감정이 투영되고, 언어를 매개로 한 언어예술이다. 또 작가의 상상에 의한 상상력의 소산이며 창조된 세계이고, 인간의 가치 있는 체험을 바탕으로 한다는 것 등이다. 이러하니 어느 학문 분야보다 인간과 인간의 삶에 깊이 천착하여 연구하는 학문이 문학인 것이다.

문학작품을 생산해냄에 있어서 작가에게 요구되는 것이 있다. “뼛속까지 내려가서 써라이 말은 나탈리 골드버그의 책 제목이지만, 가볍게 표피만 더듬는 글쓰기가 아닌, 열정과 진지함으로 진정성 있는 글을 쓰라는 의미로 다가온다. 글쓰기의 접근과 형태가 다양해지는 것은 좋은 현상이다. 그러나 문학이 실용적 목적만 갖고 있지 않다. 문학을 통해 인문학적 소양을 쌓음으로써 인문주의적 가치를 지향하는 방향으로 나아가게 된다. 그러기 위해 표현하고자 하는 대상에 대한 깊은 관찰과 정확한 이해를 해야 한다. 그 대상이 비록 라고 할지라도, 뼛속까지 내려가서 탐구해야 하는 것이다.

결국 인간이 왜 사는지, 또한 어떻게 살 것인지에 대한 깊은 성찰은, 도구적 인간으로 전락해가는 현재의 사회에서, 사람다운 삶을 사는 것이 무엇인지에 대해 생각하게 한다. 사람다운 삶을 사는 사회가 되는 길을 지키려는 의지와 그것에 대한 실천, 이것이 인간이 도구로 전락하여 비인간화되는 것을 경계하는 길이다. 인간은 존엄한 존재이므로 어느 누구에 의해서 존엄성을 손상당하면 안 된다. 그것을 지키려는 것이 문학의 숙명이고 작가의 숙명인 것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