제12회 재미수필 신인상

 

      <장려>

  

    

모든 터널은 끝이 있다

윤재현

 

 

입에 맞는 떡이 없었다. 이민 초기 직장을 찾아 헤매던 때의 일이다. 관광도시 호놀룰루에서 허드렛일은 많이 있었으나 대부분 최저임금이었다.

첫 직장은 어느 여성복 백화점의 청소부였다. 아침 문을 열기 전 화장품 냄새가 풍기는 치마, 바지, 속옷의 수풀을 헤치고 다니며 육중한 공업용 진공청소기와 씨름을 했다. 청소기가 엊그제 그린카드를 받은 사람을 알아보는지 말을 잘 듣지 않았다. 두어 시간 하다가 손바닥이 아파서 보니 물집이 잡혔다. 퇴근 전 왕방울 눈에다 씨름 선수 같은 하와이안계 청소반장이 나를 보더니 청소하는 속도가 너무 느리다고 말했다. 그만 두라는 말을 그렇게 돌려 얘기했던 것이다. 딱 하루 일하고 쫓겨난 셈이었다. 다음 해, 세금보고 하라고 하루 임금에 대한 소득통지서가 우편으로 날아왔다. 미국은 무서운 나라다.

설고 선 이국에서 먹고사는 일보다 급한 일이 없었다. 지푸라기라도 잡아야 했다. 스테인리스 냄비 장사를 하기로 했다. 미군 피엑스 입구에 냄비를 전시하고 손님을 기다렸다. 강태공 직업이었다. 앉아있기만 하면 되지만 움직이는 직업보다 더 힘들었다. 책을 읽을 수 있으면 좀 덜 지루하겠지만, 책임자는 절대로 책이나 신문을 읽지 말고 손님들과 눈을 맞추고 인사 하라고 했다. 다시 말하여 미끼를 주라는 것이었다. 미끼만 따먹고 냄비를 사는 손님은 별로 없었다. 하루에 한 세트는 팔아야 호텔청소로 생계를 유지하는 아내에게 체면이 설 수가 있었다. 공치는 날이 많았다. 간이 바싹바싹 타들어갔다.

신문의 구직난을 매일 읽고 주 정부 기관을 포함하여 여러 곳에 원서를 냈다. 와이키키 하와이안 촌의 일식 스테이크 하우스 지배인으로부터 연락이 왔다. 부지배인이 필요하다고 했다. 부지배인이라면 해볼 만한 직업이라고 생각했다.

일본말을 할 줄 아는 덕분에 채용되었지만, 그 직업은 빛 좋은 개살구였다. 우선 월급이 쥐꼬리였다. 거기다 하는 일은 안내, 웨이터, 접시 닦기, 계산기 관리, 청소부, 등 잡역(雜役)이었다. 안내원은 업소의 간판 역할을 한다. 나는 빨간 코트에 흰 바지를 입고 들어오는 손님들에게 고개를 숙이며 일본말로 인사를 했다. 미남은 아니지만 40대 초반이고 일본어도 유창한 나는 손색이 없는 안내원이었다. 문제는 나의 딱딱하고 엄격한 표정이었다. 그렇게 타고났으니 어찌하나. 어느 날, 식당 주인이 암행시찰을 왔다가 나를 발견하고 지배인을 불러 당장 해고하라고 불호령을 내렸다. 피가 물보다 진했던 때문이었을까. 한국계 지배인은 나를 해고하지 않았다. 대신 미소연습을 하라고 했다. 아침마다 거울을 보며 웃는 연습을 했지만 별로 도움이 되지 않았다. 인공 미소를 지어내기는 쉽지 않았다.

이 음식점은 철판구이로 유명했다. 요리사가 칼을 공중으로 던지는 묘기를 보여주며 철판에 음식을 만들어 왕 접시에 담아주었다. 왕 접시는 한 개만 들어도 손목이 휘청했다. 가장 힘든 일은 접시 닦기였다. 이 접시를 특수 스팀 기계에 넣어 자동세척 하지만, 사람이 한쪽에서 한 개 씩 세워 넣고, 다른 쪽에서 빼냈다. 거대한 세척기가 들어선 방은 비좁고 스팀이 자욱하여 마치 피트니스 센터의 스팀 방과 비슷했다. 몇 시간 일하다 보면 수영장에서 나온 사람처럼 옷이 흥건히 젖었다. 통풍구를 통하여 와이키키 해변에서 알로하 음악이 들려오는 찜통이었다. 서늘한 모래사장 옆에 얄궂게도 찜통이 있었다. 접시닦이는 꾀를 부리고 자주 결근하여 접시를 부지배인 내가 닦아야만 했다.

나는 매일 아내에게 학교 가기 싫어하는 아이처럼 일하러 가기 싫다고 투덜댔다. 아내는 자기는 하루에 호텔방 스물한 개를 청소한다며 남자가 접시닦이도 못하는 가 야단쳤다. 그는 아침에 화장하고 싱싱한 모습으로 일 갔다가 저녁때 픽업하러 가면 파김치가 되어 창백한 얼굴로 호텔을 나오곤 했다. 일한지 한 달 만에 체중이 15 파운드나 줄었다.

아내와 내가 그토록 열심히 일했지만 겨우 입에 풀칠을 면하는 정도였다. 괜히 이민을 왔나 하는 생각마저 들었다. 막막한 세월이었다.

찜통을 견디어내면서 내심 좋은 소식을 기다리고 있었다. 주 정부 공무원 원서를 제출해 놓았던 것이다. 드디어 소식이 왔다. 삼합三合이 맞아 떨어졌다.1970년 국회에서 직업안전(OSHA)법이 제정되어 모든 주 정부는 직업안전 행정기관을 조직하고 안전검사원을 대량 모집하기 시작했다. 둘째, 직업안전검사원 경험이 있는 사람이 부족했다. 셋째, 나는 안전검사원 경험이 있었다. 영주권을 소지한 지 얼마 되지 않았지만 하와이 주 노동국 직업 안전과 안전검사원으로 채용되었다. 전직(前職)의 희소가치 덕을 톡톡히 본 셈이다.

일한 지 얼마 되지 않은 어느 날 안전검사과장이 나에게 뜻밖의 일감을 주었다. 그 일식 스테이크 하우스의 안전검사였다. 싫지 않은 임무였다. 영업에 지장이 없도록 점심시간 전에 나는 금의환향하는 기분으로 옛 직장에 갔다. 모두 나를 반겨주었다. 검사를 끝내고 점심을 먹었다. 지배인이 점심을 대접하겠다고 제의했지만 나는 공무원 윤리규정을 내세워 사양했다.

요리사와 웨이트리스에게 팁을 후하게 주었다. 그러나저러나 그 식당은 우리 가족의 이민 초기 삶의 터전이 되어준 고마운 존재가 아닌가. 어렵지만 일을 포기하지 않고 참고 견디었다. 그 곳에서 터널을 지나고 빛을 보았다. 모든 터널은 끝이 있다.

 

2017년 신인상 장려 윤재현 (2).jpg

 

 

<당선소감>

나는 황해도 몽금포에서 태어났다. 축농증으로 코흘리개 곽선희와 동기동창으로 소학교, 중학교를 다녔다. 그는 수학과 과학을, 나는 국어와 영어를 잘 했다.

같이 월남하였는데 그는 소망교회를 설립하는 유명한 목사가 되고, 나는 미군 부대에 취업했으며 미국으로 이민하여 국방성에서 미국사람들과 평생 일하다가 은퇴하여 한국어를 제대로 배우지 못했다. 영어도 제대로 배우지 못하여 결국 두 나라 말을 제대로 못하는 언어의 반병신이 되었다.

은퇴 후 글을 쓰기 시작했다. 그동안 중앙일보와 한국 재림문학상 수필부문에서 각각 가작과 장려상을, 그리고 이번에 재미수필문학가협회 신인상에서 장려상을 받아서 글을 쓰는 가능성이 인정되었다고 생각한다.

팔십이 훨씬 지난 나이지만 계속 노력하여 죽기 전에 당선작을 쓰고 싶다. 미주 문학계에서 권위 있는 재미수필문학가협회가 주최한 작품 공모에서 엄정한 기준의 심사로 선발된 장려상을 받은 것을 자랑스럽게 생각하며 심사원들에게 감사드린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