기다림/김영화

누구를 기다리니? 이름 모르는 낯선 새에게 걱정스럽게 말을 걸었다. 새는 아무 대답이 없다.    수 없이 이 해변을 걸었지만 처음 보는 새다. 바다를 등지고 서성이는 오리 만 한 키, 검은 깃털과 뾰족한 부리, 물갈퀴 달린 발, 물에 젖은 깃털이 몸에 찰싹 붙어있고 목이 황새 목처럼 길어서, 그늘진 형체가 유난히 외로워 보인다. 가까이 다가가 카메라를 들어도 날아가지 않고 그저 불안한 눈빛으로 나를 바라본다.  

  그 새를 만난 맨하턴 비치 피어에서 돌아오는 길에, 20여분 전에 만났던 같은 모양의 새 한 마리가 모래위에 누워있다. 가까이 가서 살펴보니 숨을 쉬지 않는다. 긴 목에 작은 상처가 있고 다른 부위는 괞찮아 보인다. 나는 문득 누군가를 기리며 서성이던 그 새의 짝 일지도 모른다는 생각에 가슴이 먹먹해진다.

 AI에게 새 이름을 물어 보니, 브란트 가마우지(Brandts Cormorant)란다. 문제 해결사인 AI가 한 쌍의 가마우지를 만날 수 있도록 도와줄 수 없을까? 살아 있는 가마우지에게 내가 찍은 이 사진을 보여줄 수 있다면 좋겠다. 그가 알아보고 짝의 곁으로 와서 마지막 인사를 할 수 있도록 . 짝이 죽은것도 모르고 마냥 목을 뻬고 기다리고 있을 가마우지 생각에 가슴이 답답하고 안타깝다. 하지만 새와의 소통 한계 앞에서, 삶과 죽음의 간극 앞에서 나는 그저 무력하다.

 그 가마우지 새의 기다림도 어쩌면 인간과  크게 다르지 않을 것 같다. 수 년 전에 고등학생들을 테우고 수학여행을 떠난 배가 침몰해서 많은 학생이 돌아오지 못했다. 자식을 잃은 부모들의 애끓는 탄식소리 중에 특별히 시신도 찾지못한 부모들의 기다림은, 차라리 살아 있는 고통이었다. 우리의 삶은 어찌보면 기다림의 연속이다. 약속했던 사람과의 기다림도 있지만, 일터로 나간 사람이 해가 지면 집으로 돌아오는 일상의 기다림 같은 것도 있다. 이런 사소한 기다림도 이루어지지 않기도 한다. 어제 뉴스에서도 보았듯이 일터에서 불의의 사고로 사망한 사람 같은 경우다. 일을 마치고 당연히 집으로 돌아와야 할 사람이었다.무언의 약속 같은 가족과의 기다림이 무너진 것이다. 전쟁터에 가족을 보낸 이들의 기다림 또한 이루 말로 다 할 수 없을 만큼  클 것이다.

 기다림 속에는 인내와 사랑이 함께 깃든다. 임산부가 신생아 용품을 준비하며 태어날 아기를 기다리는 마음처럼 가슴 설레고 즐거운 기다림이다. 그러나 이 시대는 기다림과는 거리가 점점 멀어지고 있다. 손 편지 대신 실시간 메시지가, 부재 대신 즉답이 긴 시간을 모두 지워버렸다. 기다림의 고통이 사라지자 기다림 뒤의 기쁨과 감사도 함께 사라졌다. 오늘의 삶이 고단해도 견디게 하는 힘은 어쩌면 나아질 내일을 향한 조용한 기다림 였을지도 모르는데.

  여름 같은 봄날의 해변이다. 오늘도 여느 때처럼 헐모사 비치(Hermosa Beach)에서 맨하튼 비치 피어까지 걷는다. 꽃잎처럼 발등에 앉은 파도의 거품이 발가락을 간지럽힌다. 적당히 차가운 물결과 바닷바람이 몸과 마음을 맑힌다. 파도가 햐얗게 밀려오던 밀물도 점점 힘을 잃고 서서히 물러가고 있다. 바다가 품었던 단단해진 모래밭에 새끼 갈매기의 발자국들과 내 발자국은 희미하게 남겼다.

희미하게 남긴 새나 내 발자국이 파도에 실려 지워지듯이 죽은 새의 흔적도 지워 질것이다. 그리고 맨하튼 비치에서 짝을 기다리는 가마우지 처럼,  전쟁터에 살고 있는 가족의 생사를 몰라  애타게 소식을 기다리는 사람들처럼, 우리는 저마다 다른 방식으로 누군가를, 혹은 어떤 순간을 기다린다.

봄은 기다림의 계절이다. 새싹이 움트고 꽃이 피어나기 까지 언제나 참아내고 기다리는 시간이다.   홀로 남은 가마우지 또한 언젠가 그 슬픔을 썰물에 실어 보내고, 여름의 바다를 맞이하게 되리라.