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사막의 꽃/김영화
엘에이공항 탑승 앞에 출발 두 시간 일찍 왔다. 도착지가 인천공항인데도 한국 사람보다 타 국인이 더 많아 보인다. 그 중에 붉은색 수건을 머리에 쓰고 진노랑 긴 치마에 삼원색 재킷 옷차림의 검은 피부의 젊은 여인이 내 눈을 자극한다.
탑승을 기다리는 사람들 대부분은 딱딱한 플라스틱 의자에 반쯤 누워서 하품하며 잠을 청하거나 휴대전화를 보고 있는데, 키가 큰 그녀는 귀에 이어폰을 꽂은 채 중얼거리며 주위를 맴돌며 운동하고 있다. “저 여자가 내 옆에 앉으면 어떡하지?”라고 눈살을 찌푸리며 옆에서 졸고 있는 남편에게 말했다.
탑승이 시작되어 맨 끝줄에 서서 내 자리를 찾아갔다. 내 옆 좌석에 그 여인이 앉았다가 나를 보고 한껏 귀여운 미소를 지으며 일어서지 않는가. 내 불길한? 예감은 빗나가지 않았다. 그녀의 두 자녀와 남편이 창가 쪽에 나란히 앉고 그녀는 내 옆에 앉았다. 가까이 앉아서 보니 웃을 때마다 양 볼에 보조개가 귀엽고 흑인 특유의 윤기 나는 피부와 특별히 반짝반짝 빛이 나는 검은 눈동자가 사랑스럽기까지 하다.
70년대 말, 오리건주의 코밸리스 한 병원에서 간호사로 일할 때였다. 전 직원이 백인인 그 병원에서 유일한 동양인 간호사였던 내게, 한 60대 백인 환자는“유색인 간호사가 주는 약은 더러워서 먹을 수 없다.”라며 약을 내 얼굴에 뿌리고 침을 뱉기도 했다. 그 일 이후, 지금도 나는 웬만한 말은 참아 넘기나 인종차별적인 말에는 참지 못하고 분을 낸다. 아마도 그때 받은 상처가 너무 깊었던 것 같다. 인종차별의 피해자였던 내가 어떻게 이리도 사랑스러운 여인을 차별하며 배척할 수 있단 말인가. 그녀의 특이한 옷차림과 행동이 눈에 거슬린다며 마음속으로 그녀를 업신여긴 내가 부끄럽고 많이 미안했다.
내 안에 이런 편견과 차별이 깊이 숨어있는 줄 몰랐다. 나는 병원에서 오랫동안 다른 여러 인종의 동료와 환자를 만나 좋은 관계로 일했다. 가족처럼 친하게 지내는 흑인 친구도 있다. 사람 차별하는 것을 아주 싫어했던 내가 아니었던가! 내 속마음을 모르는 이 여인에게 용서를 빌고 싶어졌다. 한참을 망설이다 내 이름을 말하고 그녀의 이름을 물었다. 그녀는 방긋이 웃으며 “내 이름은 사하라(Zahara)예요. 꽃이라는 뜻이에요.”라고 한다. 내가 웃으며“사하라 사막은 아는데 이렇게‘사하라’라는 이름의 어여쁜 여인이 있는 줄 꿈에도 상상 못 했네.”라고 하니 좋아한다. 사막의 꽃으로 잘 어울리는 사하라와 나는 이렇게 끝없는 대화를 이어가며 서로를 알게 되었다.
사하라는 아프리카, 세네갈 이민자의 딸로 프랑스에서 태어났다. 어린 시절을 술과 마약이 일상이던 동네에서 어렵게 살았다. 막노동하는 부모 밑에서 6형제 중 맏이였던 그녀만 끝까지 학교 다니며 열심히 공부했다. 그때의 고통스러웠던 이야기를 하며 눈물을 글썽인다. 120명의 재학생 중 자신만 흑인인 유대인 중 고등학교에 다녔다. 프랑스어 외에 러시아어를 해야 입학할 수 있는 학교였다. 나는 학교에서 선생이나 학생들에게서 차별받지 않았냐고 조심스럽게 물었다. 아이러니하게도 그들은 그녀를‘아프리카 어느 나라의 대사님 딸’로 믿고 존중해 주었다고 비밀스럽게 말한다. 그 비밀을 지키기 위해 얼마나 많은 노력을 했을지 짐작이 된다.
사하라는 대학과 대학원에서‘국제 관계와 정보’를 공부하여 프랑스는 물론 여러 미개발 국가를 위해 영화를 만들고 있다. 영화로 세상의 가장 낮은 목소리를 기록한다고 한다. 그녀는 길고 어두운 터널을 통과해 빛으로 나왔다. 그녀의 남편과 함께 세계 곳곳을 여행하며 글을 쓰고 영화를 만들며 행복하게 사는 모습이 눈에 보인다. 그들은 마치 물이 거의 없고 강한 바람과 낮의 뜨거운 태양 빛, 밤의 냉기가 생명의 경계를 묻는 사하라 사막에 피는 아름다운 나팔꽃, 다투라{Datura}처럼 강인하게 일어섰다.
반세기 전, 나 역시 젊은 나이에 미국으로 이민 왔다. 사하라 부모처럼 그 추운 시카고의 칼바람 같은 어려움을 이겨내야 했다. 다음 달 내야 할 허름한 아파트 월세를 걱정했고, 첫아이를 임신하여 입덧이 심해 물도 토해 낼 때, 내일 먹을 양식을 걱정하며, 아파트 유리창 안쪽에 고드름이 열리는 추위를 견뎌내야 했다. 그녀의 부모처럼 우리도 최선을 다하여 일하며 두 아들을 양육했다.
고생만 하고 돌아가신 사하라의 어머니가 나와 나이가 같다고 한다. 그녀에게 연민이 간다. 지금의 사하라가 있기까지는, 힘들게 살아낸 이민 1세 부모와 함께 그녀 역시 여러 모습의 고통을 감수해야 했다. 그녀의 이야기에 가슴이 아리고 대견스럽다. 사하라의 어머니나 나처럼 이민 1세만 고생한 것이 아니었다. 2세 역시 각자의 방식으로 힘들게 견뎌왔다는 사실을 사하라의 말을 들으며 깨달았다. 40 중반의 그녀 나이와 비슷한 우리 두 아들도 이민자의 2세로서 오늘의 성공된 삶을 이루기까지 최선을 다하느라 사하라 만큼 힘든 시간을 보냈으리라. 아들을 격려해 주고 더 많이 사랑해야겠다. 그녀는 내가 자기 어머니처럼 강인하고 이해심이 많은 사람 같다며‘엄마’ 하며 내 목을 껴안는다. 엉겁결에 귀엽고 성숙한 딸이 하나 생겼다. 우리는 서로의 삶 속에서 같은 자리에 남아있던 상처를 알아보았다.
그녀 가족은 지난해 여름을 한국에서 보냈다. 전주 민속촌, 한옥마을을 다니며 한복을 입고 찍은 사진을 보여준다. 부산과 남해를 돌아다녔는데 사람들이 친절하고 화장실과 대중교통이 프랑스보다 몇 배 깨끗하고 좋았단다. 한식 중에 김치도 맛있었고, 만두와 잡채를 다시 먹고 싶다며 침을 삼킨다. 이번에는 인천공항에서 방콕으로 가서 6개월 동안 그곳에서 살면서 그곳 여인들의 삶에 대해서 연구하겠다고 한다.
거의 매년 오는 미국은 주로 그들이 공부했던 뉴욕에서 지내는데, 내년 구월에는 우리 집에서 그리 멀지 않은 베니스 비치에 사는 친구 집에 오겠단다. 그녀의 남편은 프랑스 요리에도 전문가 수준이라며 우리에게 맛있는 요리를 대접하고 싶다고 한다. 나는 만두와 잡채를 만들어 주마고 약속했다. 여행과 글쓰기 취미가 같은 사하라와 나는 나이나 국적을 떠나서 좋은 친구가 되자고 새끼손가락도 걸었다. 낯선 사람으로 시작된 만남은, 삶을 비추는 작은 거울이 되었다.
사막에도 꽃은 핀다. 그리고 사람의 마음에도 이해와 사랑은 그렇게 피어난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