가을날 노랗게 물들인 은행잎이
바람에 흔들려 휘날리듯이
그렇게 가오리다.
임께서 부르시면……

호수에 안개 끼어 자욱한 밤에
말없이 재 넘는 초승달처럼
그렇게 가오리다.
임께서 부르시면……

포곤히 풀린 봄 하늘 아래
굽이굽이 하늘 가에 흐르는 물처럼
그렇게 가오리다.
임께서 부르시면……

 

 

파아란 하늘에 백로가 노래하고
이른 봄 잔디밭에 스며드는 햇볕처럼
그렇게 가오리다.
임께서 부르시면……


―신석정(1907∼1974)


최근의 시에 익숙한 사람들에게 이 시는 어떻게 읽힐까. ‘임’이라는 단어를 읽자마자 구식이라는 생각을 할 수 있다. ‘가오리다’는 말투에서 고전이라는 단어를 떠올릴지도 모른다. 맞다. 이 시는 조금이 아니라 아주 예전 작품이다. 우선 탄생부터가 1931년이어서, 몇 년 후면 100주년이 된다. 하지만 오래된 것이 항상 뒤에 머물러야 하는 것은 아니다. 때로는 지금의 것이 아니어서 눈길이 가는 경우가 있다.

이 작품은 신석정 시인의 초기 대표시다. 당시의 신석정 시에 대해서 김기림은 ‘목신이 조는 듯한 세계를 소박하게 노래한다’고 칭찬한 적이 있다. 무엇보다 이 시가 좋은 이유는 여기에 생활이 없기 때문이다. 돈, 빚, 일, 싸움, 경쟁과 같은 일상과 생활이 이 작품에는 없다.

 

삶의 현장과 동떨어져 아름다운 자연만 찾는 태도를 비판하는 목소리도 있을 수 있다. 그런데 우리에게 삶의 공기청정기가 필요한 것도 사실이다. 세파에 흔들리고 찌든 마음을 안고 살다가도 이런 시를 보면 눈이 시원해지고 마음이 맑아진다. 실제 눈에는 흐린 봄 하늘만 보여도 마음으로는 맑은 봄 하늘을 상상할 수 있는 법이다. 이제 바람이 봄을 재촉하는 계절이 찾아왔다. 모든 것이 다시 시작되는 이때는 잠시 시 속에 들어가 마음과 영혼을 닦고 나올 시간이기도 하다.

 

나민애 문학평론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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