넓이와 높이보다
내게 깊이를 주소서,
나의 눈물에 해당하는……
산비탈과
먼 집들에 불을 피우시고
가까운 곳에서 나를 배회하게 하소서.
나의 공허를 위하여
오늘은 저 황금빛 열매를 마저 그 자리를
떠나게 하소서.
당신께서 내게 약속하신 시간이 이르렀습니다.
지금은 기적들을 해가 지는 먼 곳으로 따라보내소서.
지금은 비둘기 대신 저 공중으로 산까마귀들을
바람에 날리소서.
많은 진리들 가운데 위대한 공허를 선택하여
나로 하여금 그 뜻을 알게 하소서.
(하략)
―김현승(1913-1975)
김현승은 가을과 기도의 시인으로 알려져 있다. 그런데 가을과 기도와 김현승이라는 조합은 대표작 ‘가을의 기도’ 한 편으로 만들어진 것이 아니다. 오늘 소개하는 ‘가을의 시’ 역시 그의 특징을 잘 보여준다. ‘하소서’로 끝나는 문장, 낮은 자세, 간절한 내용이 딱 기도 그 자체다.
기도는 언제 필요할까. ‘감사의 기도’라는 말은 있지만 행복할 때 기도는 의외로 짧게 끝난다. 반대로 우리의 마음이 무너져 내릴 때, 붙잡을 것이 없을 때 기도의 문장은 자연스럽게 나온다. 이대로 끝낼 수는 없을 때, 견뎌서 다시 일어날 힘을 구할 때 기도는 찾아온다. 시인은 눈물을 흘리는 고통과 정처 없는 방황을 극복하고자 기도한다고 했다. 지금 이 시련에 담긴 큰 뜻을 이해하기 위해 기도한다고 했다. 무슨 종교인지가 중요치 않고 기도하는 저 마음이 중요하다.
시인이 말해주지 않아도 우리는 지금 기도가 간절하다는 사실을 잘 안다. 수능 시험이 끝난 지금 많은 학생과 부모에게 시인의 기도를 전하고 싶다. 그동안 애쓴 아이들, 버틴 부모들이 기도를 붙들고 가을을 무사히 건너시기를 바랄 뿐이다.
나민애 문학평론가