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옥상에 올라온 참새를 보고 놀라다가 아 너는 새지 너는 날 수가 있지, 라고 중얼거렸다
살아 있다는 것을 잊고
살아 있다
너무 위험하다고 느껴질 때는
나한테 전화해도 된다고 선생님이 말해줄 때
고마웠다
삶은 어디에나 있다
삶은 어디에나
삶은 어디에
삶은 어디
삶은
동생이 비둘기에 대한 단상을 이야기해줄 때
느꼈던 감격이 때때로 그에게 힘이 되기를 기도했다(후략)―홍지호(1990∼ )》

얼마 전, 여든 넘으신 분과 인터뷰한 적이 있었다. 요즘 세상이 너무 이상하다고, 우울증에 걸려 있다고 하소연하셨다. 그러시냐고, 그러시겠다고 고개를 끄덕이다 돌아왔다. 다시 얼마 전, 대학교 졸업을 할까 말까 고민하는 학생과 면담한 적이 있었다. 영혼을 팔아서라도 취업하고 싶은데 정말 우울하다고 말했다. 그렇네, 정말 그렇겠네 고개를 끄덕이다 돌아왔다.
 

 

한때는 동감을 표시하는 것이야말로 다정한 일이라고 생각했는데, 이럴 때는 입이 쓰다. 입이 쓸 때에는 종교나, 기도나, 신념을 찾아 매달리게 된다. 내가 알기로, 시인에게 있어 종교는 바로 시다. 시인에게 있어 우선순위의 신념이 있다면 그것도 시다. 우리에게 종교나, 기도가 필요하다면 시인의 그것을 보는 것이 나쁘지 않다.
 

한 시인의 기도 같은 시를 보자. ‘삶은 어디에나 있다’는 말에서 삶은 대체 어디에 있고 무엇인가로 변화하는 기도를 듣자니 마음이 쓰다. 살아 있다는 느낌을 받지 못하면서 살아간다는 말이 절망스럽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이 시는 타인의 걱정에 감사하고 다른 사람이 힘을 내기를 바란다. 기도와 기원이 모든 것을 해결해주는 것은 아니다. 하지만 그것을 하지 않고는 견딜 수 없을 때가 종종 있다.

 

나민애 문학평론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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