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2월 ―홍윤숙(1925∼2015)

한 시대 지나간 계절은/모두 안개와 바람/한 발의 총성처럼 사라져간/생애의 다리 건너/지금은 일년 중 가장 어두운 저녁/추억과 북풍으로 빗장 찌르고/안으로 못을 박는 결별의 시간/이따금 하늘엔/성자의 유언 같은 눈발 날리고/늦은 날 눈발 속을/걸어와 후득후득 문을 두드리는/두드리며 사시나무 가지 끝에 바람 윙윙 우는/서럽도록 아름다운/영혼 돌아오는 소리

“그런 멋진 일은 다음 생에서나 가능할 거야. 이번 생은 글렀어.” 친구에게 메리 크리스마스 인사를 했다가 이런 메시지를 받았다. 올지 안 올지도 모르는데 다음 생이라니. 인생에서 리셋이 가능할 리 없는데 우리는 게임을 너무 많이 했나 보다. 게다가 다음 생이 온대도 지금보다 나으리라는 보장도 없다. 원래 인생에는 찬란함보다 고난의 비율이 더 큰 법이다. 인생의 기쁨이 돌멩이처럼 흔했다면 우리는 그것을 지금처럼 간절히 바라지 않았을 테니까 말이다.

지금은 12월, ‘다음 생’은 너무 멀고 ‘다음 해’는 가장 가까운 때다. 우리의 다음 해에도 아주 멋진 일 따위는 일어나지 않을 것이다. 올해처럼 많은 고난과 적은 기쁨이 예정되어 있을 것이다. 그래도 살고 싶고, 겪고 싶고, 기다리고 싶다. 어느 누구의 삶이라고 매 순간 즐거웠을까. 우리는 추위 속에서, 어둠 속에서, 빛 속에서 한결같이 살아 있고 살아간다.

이게 12월의 마음이다. 아름답지도 않을 다음 해를 착실하게, 끈질기게 생각하고 기다리는 마음의 달. 그래서 홍윤숙의 ‘12월’을 소개한다. 이 시에는 따뜻함이나 환희는 없다. 시인에게 지난 한 해는 안개, 바람, 북풍 등으로 채워져 있었다. 삶의 민낯은 생각보다 척박하다. 그렇지만 뭐 어떤가. 즐겁지 않다고 해서 소중하지 않은 것은 아니다. 나는 내 못난 자식이 그렇게 애틋하고 소중할 수 없다. 12월에 기다리는 다음 해도 그렇다. 기쁨을 주지 않아도 괜찮다. 우리의 내년은 이미 소중하다.  
 
나민애 문학평론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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