아들과 함께 밥을 먹다가
송곳니로 무 조각을 씹고 있는데
사각사각사각사각
아버지의 음식 씹는 소리가 들린다
아 그때 아버지도 어금니를 뽑으셨구나
씹어야 하는 슬픔
요즘은 초록색 이파리가 빛나고 기운이 생동하는 때이다. ‘신록예찬’이라는 말에 가장 잘 어울리는 시절이 막 시작됐다. 아이러니하게도 이즈음에 몸살을 앓는 이가 퍽 많다. 때늦게 독감이 유행하더니만 아프다고 수업에 결석하는 아이들도 꽤 많아졌다.
유행에 동참해 나도 몸살이었다. 죽은 듯이 누워 있었더니 어린 아들이 곁에 와서 운다. 엄마는 이제 죽는 거냐며 서럽게도 운다. 그래서 생각했다. 사람은 언제 죽는 걸까. 내가 궁금한 것은 수명이나 사망의 시점이 아니다. 저 아이의 세계에서 엄마는 언제 죽는 것일까. 이 질문에 대해 나는 답을 모른다. 그렇지만 시인들은 진작부터 그 답을 알고 있었다.
탁월한 시인들은 말해 왔다. 죽은 그는 내가 기억하는 한 아직 죽지 않았다고. 그가 운명대로 죽었어도 나의 운명에는 아직 남았다고. 유자효 시인의 시를 봐도 알 수 있다. 여기에는 평범한 아침 식탁이 등장한다. 시인과 아들 단둘이서 식사를 하고 있다. 그런데 무를 어금니로 씹지 못하고 조금씩 송곳니로 씹다가 시인은 문득 아버지를 떠올리게 되었다. 예전 연로하신 아버지가 지금의 자신과 같았음을 깨닫게 되었다. 아버지의 나이가 된 아들은 이제야 아버지를 더 많이, 깊이 이해하게 된 것이다. 순간 시인과 아들의 식탁은 아버지와 시인의 식탁으로 바뀌기도 한다. 자세히 보면 이 식탁은 시인과 아들 단둘만의 것은 아니다.
사랑하는 사람이 생긴다는 것은 고맙고 신비한 일이다. 어느 경우 사랑은 사람의 수명보다 더 오래 살아남기도 한다. 이 사실만으로도 우리는 고단한 생을 더 기쁘게 지탱할 수 있다.
나민애 문학평론가