솔방울을 그리며 / 김이경

 

 

늦깎이로 세밀화를 배운다. 작은 꽃잎, 나뭇잎의 그물맥, 날개를 접은 새의 깃털, 그런 자잘한 것들을 서툴게 그린다. 작은 것들의 숨결들을 잡아보고 싶다. 물오리 발목에 맴도는 물살을 그리며 물결의 잔잔한 떨림으로 연필 끝이 물결치게 하고 싶다. 그렇게 작은 숨결과 숨어있는 모습을 서툴게 그려나간다.

솔방울을 그리는 날이다. 타원형으로 윤곽을 대충 그려놓고 하나하나 인편鱗片(비늘잎)을 그린다. 빠진 앞니처럼 사이가 성글다. 그 자리를 음영으로 채워 넣다가 문득 손이 멈춘다. 벌어진 솔방울 성긴 비늘잎 사이로 바람이 휘휘 지나가는 소리가 들린다. 앞니가 빠지고 허술해진 잇몸 사이로 새 나가던 말소리도….

소나무 꽃은 암수가 따로 핀다. 암꽃은 소나무 가지 끝에 고운 자줏빛으로 핀다. 무성한 수꽃이 철없는 남정네처럼 송홧가루 풀풀 날리며 봄을 뿌려댈 때도, 솔잎 사이에서 붉은 입술을 다물고 몸을 사린다. 제 나무에서 날리는 송홧가루는 받아들이면 안 된다고 아무도 가르쳐 주지 않는다. 그러나 식물은 우수한 종족을 보존하는 방법을 사람보다 더 잘 안다. 그들의 유전자에 새겨진 부호만으로 다소곳 몸을 사리다 멀리서 날아오는 꽃가루를 품어 안는다.

가루받이가 되면 몸을 닫는다. 제 품에 든 생명을 보듬고 다독이며 공그른다. 눈이 오고 비바람이 불어도 제 몸 하나로 그것들을 막아낸다. 처음엔 꽃잎이 몸을 말고 씨앗을 감싸 안는다. 씨앗이 조금씩 여물어갈수록 자줏빛 고운 옷은 물 빨래한 비단이 된다. 아이들이 자라는 터를 안온하게 지키기 위해서는 비단 옷쯤이야 벗어던지고 온몸이 바람막이가 되어야 한다.

비바람이 불 때마다 솔방울의 관절은 신음한다. 추우면 온몸으로 감싸 안고, 더우면 뼈 마디마디 펼치면서 제 몸 비틀리고 사위는 건 아랑곳없다. 한 번 열고 닫을 때마다 관절이 뒤틀리고 뼈마디가 삐걱거리는 통증. 욱신거리는 열기와 가쁜 숨결로 아이들을 보듬고 시간을 이겨낸다. 아이들을 지키기 위해서는 압술형壓術形이라도 마다할 수는 없다. 어미의 관절염으로 지켜진 보금자리. 꽃은 살갗이 갈라지고 터지면서 나무껍질처럼 단단하고 거칠어진다. 그렇게 갑옷이 되며 꽃이란 이름을 버리고 무장한 장수 같은 어미, 솔방울이 된다.

품어 안은 씨앗은 자그마치 200여 개. 그들을 품고 진액을 내어주며 모진 눈비도 가려준 긴 시간. 갯바람 쐰 사내처럼 투박하고 거칠어진 어미는 다 자란 아이들을 새 세상으로 보내야 한다. 바람에 태워 새 땅으로 날려 보내야 한다. 지치고 뒤틀린 몸에 바람을 안으며 산고를 치른다. 어느 어미가 산도가 열리는 고통 없이 해산을 하랴.

어미의 통증으로 열린 길을 닫고 아이들은 하나 둘 떠나간다. 관절 마지막 마디까지 벌려 길을 열어주지만 미처 여물지 못한 것들은 날지 못한다. 그 아이들이 날 수 있을 때까지는 다시 품어야 한다. 여문 아이들을 차례로 떠나보내며 끝날 것 같지 않은 산통에 조금씩 부스러지고 이지러진다. 마지막 씨앗마저 다 날려 보내면 성글고 허름해진 몸뚱이 하나로 남는다. 어느 날 불어오는 바람에 다 비어버린 몸을 맡기고 조용히 낙하한다. 버석거리는 몸으로 땅에 눕는다.

솔방울이 습기를 머금으면 비늘잎을 닫는 성질을 이용해 천연 가습기로 사용하는 사람도 있다. 그러나 그것은 뼈마디가 으스러지며 열었다 닫았던 산고의 길, 수백 번 어쩌면 수천 번 겪었을 통증의 흔적임을 아는지.

솔방울에서 눈을 뗄 수 없다. 비늘잎 사이사이 씨앗이 머물렀던 빈자리가 동굴처럼 어둠으로 남아있다. 그 어둠을 살며시 만져본다. 온몸을 다해 품었던 삶의 흔적에는 자식들의 온기도 남아있지 않다. 그 속에서 어눌해진 목소리가 들리는 것만 같다. 틀니조차 버겁도록 허물어진 잇몸도 보인다.

남편을 떠나보낸 서러운 젊음. 당신의 비단결 같은 날들이 이지러지고 버석거리는 줄도 모르며 홀로 일곱 남매를 품어야 했던 내 어머니. 풍상에 휘둘린 세월이 갈라지고 터진 자국이 솔방울의 이지러진 인편이 아닌가. 비늘잎 하나하나가 어머니의 눈물방울이다. 차마 들여다보기도 아프다. 연필을 잡은 손이 파르르 떤다.

눈을 감는다. 떨리는 손에 힘을 준다. 심호흡을 하며 연필을 다잡는다. 천천히 어둠을 다듬어간다. 소나무의 꽃말이 '불로장생, 변치 않는 사랑'이라고 했던가. 나는 어둠 하나로 불로장생을, 뜨거워진 내 숨결로 사랑을 그려 넣고 싶다. 아직은 서툰 솜씨지만 음영을 하나하나 그려 넣으며 어머니의 세월을 그리고 싶다.

그 어둠만큼 아팠을 시간을 그린다. 비늘잎 하나하나가 윤곽을 가지고 또렷이 살아나면 내 어머니의 시간도 살아날 수 있을까. 그 어둠 속에 담긴 시간을 다시 만나볼 수 있지나 않을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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