사랑의 거리 1.435미터 / 김만년

 

 

철길은 차가운 대지에 붙박인 채 육중한 기관차를 떠받치고 있다. 두 가닥 은빛 선을 잇대어 세상 어디든지 간다. 상처 같은 세월을 나란히 베고 누워 산을 넘고 강을 건넌다. 사람 사는 마을을 굽이굽이 돌아간다. 정거장마다 숱한 물상과 인정人情들을 집결시키고 분산시킨다. 한순간 용융점으로 끓어올랐던 기억 때문일까. 겉보기엔 딱딱한 쇠붙이지만 속은 따뜻하다. 그래서 철길을 두고 사람들은 일찌감치 혈맥이라고 불러왔다. 기관차가 한때 우리 민족의 여명기를 견인했던 심장이었다면 철길은 그 심장을 뛰게 한핏줄이었다고 해도 무방하리라.

철길의 외형은 단순하다. 그냥 강철로 이어진 두 줄기 철선이다. 그러나 저 단순성이 기차를 무탈하게 안착시키는 힘의 근원이다. 철길은 직각으로 꺾이거나 돌아가는 법이 없다. 샛길로 빠지거나 허황된 꿈을 좇아 탈선을 꿈꾸지도 않는다. 애오라지 한자리를 유지하며 직곡直曲의 단순성만 반복한다. 일생 외길만 고집하시던 아버지의 괭이질처럼 달 뜨면 달 바라기를 하고 해 뜨면 해바라기를 한다. 행여 사나운 바퀴의 횡력橫力에 밀릴까 제 몸을 침목 위에 단단히 결박시킨다. 철커덕철커덕, 제 살을 깎아 기차를 떠받치고 세상을 공명시킨다. 시류에 개의치 않는 뚝심이고 철심鐵心이다. 보시라면 이만한 보시가 또 있을까. 묵묵하고 단순한 것이 아름답다.

철길은 굽은 길을 지향한다. 기차가 강줄기를 따라 느리게 돌아갈 때면 철길도 굽은 허리춤을 들썩이며 장단을 맞춘다. 사람들은 난간에 기대어 달캉거리는 절음絶音을 반주 삼아 콧노래를 흥얼거리기도 한다. 산과 마을이 뻐끔담배처럼 흘러가던 시절이었다. 아마 철길에 마음이 있다면 열두 굽이 강줄기를 따라 아라리 가락처럼 흘러가던 그때가 호시절이었다고 하지 않을까. 그러나 모든 길이 직선으로 펴지면서 흥얼거리던 콧노래도 차창을 스치는 고즈넉한 풍경도 사라졌다. 저 철길도 머잖아 굽은 허리를 펴고 직선의 시간에 들것이다. 기차가 휘모리장단으로 질주할 때 심장은 두근거리고 기억은 어질하다. 누군가 속도는 망각에 비례한다고 했다. 속도가 욕망으로 등치되는 곧은 길이라면 굽은 길은 욕망의 뒤쪽에 있고 과거로 가는 길목에 있다. 과거는 종종 그리움으로 환원된다. 욕망과 그리움이란 중량을 저울에 달았을 때 그리움 쪽으로 기우는 것도 굽은 길 위에서다.

그래서일까. 철길에는 회귀성 짙은 촉매들이 묻어있다. 나란히 이어진 침목들이 먼 과거로 가는 기억의 사다리 같은 착시현상을 불러일으킨다. 가물가물 소실점으로 사라지는 철길을 바라보노라면 철길 끝에서 깨꽃 같은 이야기들이 피어오른다. 산딸나무 같은 소녀들이 지나가고 능금 같은 웃음들이 흘러간다. 후후, 가락국수 국물을 불어먹는 소리, 플랫폼을 뛰는 발자국 소리, 왁자한 입영 군가 소리가 들린다. 철둑 너머로 뭉게구름과 염소의 말뚝과 아버지의 지게가 흘러간다. 늙은 오동나무가 서있고 저녁연기 피어오르던 오래된 마을이 보인다. 손 흔들며 미지의 세계로 출항하던 옛 소년의 불안한 발걸음도 보인다. 한때 내 삶의 발원지이자 그리움의 기항지이기도 했던 그 먼 고향집이 보이는 것이다. 이제는 그리움으로만 갈수 있는 기억의 처소이다. 오래전에 집을 잃어버렸기 때문이다. 아직 내 주머니에 그리움이란 잔고가 남았다면 탈탈 털어 오늘은 그 먼 곳으로 가는 기차표를 끊고 싶다.

철길은 사람과의 관계를 생각하게 한다. 우리는 일생을 관계 속에서 살아간다. 관계가 소원해져 속상해하고 관계가 좋아져서 안도한다. 관계 때문에 울고 웃는다. 이 심리적 관계를 물리적 거리로 환산하면 얼마쯤이 적당할까. 철길의 궤간은 1.435미터이다. 손 뻗으면 닿을 거리다. 어느 한 쪽이 멀어지거나 가까워져도 기차는 탈선한다. 철길은 넘치거나 모자람이 없다. 정교한 맞물림으로 평형平衡을 잡고 평행을 유지한다. 켄트*로 원심을 잡으며 험한 곡선을 함께 돌아간다. 철길의 불변성 때문이다. 이 약속된 거리가 있기에 기차는 긴 밤을 달려 승객들을 목적지까지 무사히 도착시킨다. 사람과의 관계도 그렇다. 늘 넘치거나 모자람이 문제다. 너무 가까우면 상처를 입게 되고 너무 멀면 관계가 소원해진다. 손닿을 만큼의 거리를 두고 먼 길을 동행하는 철길처럼, 사람과의 관계도 1.435미터, 아쉬울 만큼의 여백의 거리가 필요하지 않을까. 오래가는 사람들이라면,

부부 사이의 거리 또한 그렇다. 흔히들 살을 맞댄 거리를 부부 사이의 거리라고 한다. 그러나 이 거리는 물리적인 거리이지 정신적으로까지 합일된 거리는 아니다. 그래서 두 사람이 평생 한마음으로 살아간다는 것은 참 어려운 일이다. 나 또한 살을 맛 댄 거리를 부부간의 거리라고 곡해하면서 살아왔던 것 같다. 풋풋한 사과 꽃 같은 마음에서 빛바랜 사과만 남고 꽃을 잃어버린 날들이 아니었는지. 한 방향을 응시하기보다는 마주 보기를 했다. 아내의 영역을 함부로 침범했던 것 같다. 신혼 때는 구심을 잃고 자주 밖으로 튕겨나가기도 했다. 삶의 궤간이 너무 팽팽해서 마찰음을 내며 탈선의 곡예를 했다. 살을 맛 댄다는 것이 그만 화를 맛 대지 않았나 싶다. 생각해 보면 생의 험한 곡선을 돌 때마다 중심을 잡아 준 것은 언제나 아내가 아니었던가. 두 줄기 철길처럼 내가 밖으로 튕겨나가려는 원심이었다면 아내는 나를 끌어당기는 구심이 아니었을까. 먼 길 돌아와 보니 알 것 같다. 시리고 험한 길 함께 굽어 준 아내의 곡정曲情이 고맙다. 나란히 뻗은 철길처럼 이제 둘은 한곳을 바라보며 걷는다. 원심이 구심에 조응하는 시간이다. 그런 계절이 왔다. 세월이라는 궤간이 생긴 것이다. 부부간의 거리를 수치로 측정할 수 있다면 역시 1.435미터가 아닐까. 배려의 거리이자 존중의 거리이다. 백 년을 동행하는 지순한 사랑의 거리이기도 하다.

산모롱이 돌아가는 철길을 바라본다. 어느 먼 고대의 산맥에서 흘러온 지류기이기에 품이 저리 크고 넉넉할까. 한생 바닥에 눕혀 푸릇한 산맥으로 기차를 떠나보내는 철길, 저렇게 은빛 팔을 뻗어 산을 품고 세상을 잇는다. 때론 먼 곳을 반추시키고 그리운 사람들을 전송한다. 치우침 없이 살라는 평심平心의 지혜를 일깨운다. 한자리를 지키라는 항심恒心의 마음을 읽는다. 바닥에 누운 생이라고 어찌 하찮게 여기랴. 골판지에 쭉 그어 놓은 묵화처럼 단순한 철길, 어쩌면 저 철길이야말로 세상에서 가장 아름다운 곡선이 아닐까. 긴 세월 나와 고락을 함께해 왔으니 오늘은 그만한 헌사쯤은 해 두고 싶다. 나를 여기까지 무탈하게 데려다준 철길의 곡정이 또 고맙다.

동륜에 깎인 철길이 아침햇살에 반짝인다. 빛나는 것들은 언제나 상처 뒤에 오는 것일까. 우리네 인생도 그러한지. 철길이 은빛 손을 흔들며 가뭇없이 멀어져간다.

 

*켄트(cant): 기차가 곡선을 돌때 밀림을 방지하기 위해 레일 바깥 부분을 더 높게 하는 것.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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