새참 / 배귀선

 

볕이 고추만큼이나 매워졌다. 땀을 닦으며 집에 드니 참 때다. 주머니에 넣어온 풋고추 몇 개 꺼내놓고 아침 겸 점심을 찬물에 만다. 탱탱해진 밥 한 수저 우겨넣는다. 된장 얹은 고추를 베어 물자 전화벨이 울린다. 원고청탁이다. 목소리로 미루어 미안한 마음 뚜렷하다. 급작스런 청탁인 만큼 어디 편하겠는가. 한두 번 경험한 일도 아니어서 덤덤히 듣는다.

“오늘 오후 6시까지 칼럼 좀 써 주셔야겠어요. 꼭 좀 부탁합니다.”

지역신문 관계자의 목소리가 뙤약볕 푸성귀처럼 숨죽어 있다. 얼마나 다급했으면 나 같은 사람에게 부탁하겠나 싶어 고추 수확을 미루고 책상 앞에 앉는다. 어찌 보면 땜빵인 셈인데, 문득 ‘땜빵에 대한 단상’이라는 주제가 떠올라 글의 가닥을 잡는다.

주관적으로 기울면 식상한 글이 되고 너무 객관적이면 글에 힘이 없으므로 손에도 눈에도 적당한 페이스를 유지하며 써 내려간다. 그렇지 않으면 항의가 일기 때문에 최대한 평정심을 지키며 이끌어 간다.

땜빵에 대한 단상, 사전적 의미로 ‘사고로 머리에 남은 상처, 또는 머리에 군데군데 머리카락이 나지 않는 부분’을 의미하기도 하지만, 다른 의미로는 ‘대리, 대체, 대신해서 채우다’라는 말로 느낌상 어딘가 모르게 부족한 듯한 뜻으로, 차선책인 꿩 대신 닭쯤으로 생각해도 무방할 것 같다.

그러나 영화에서 주연보다는 조연의 역할이 더 중요하고 문학에서도 원관념보다는 보조관념이 살아 있어야 한다. 주제보다 소재가 중요하듯 인간사에도 보일 듯 보이지 않게 드러내지 않는 보조적 행위야말로 주체를 있게 하는 미덕이 아니겠는가. 예수는 인간이라는 주체를 위해 사랑이라는 보조적 역할을 들고 이 땅에 온 사람이다. 그는 자신의 삶을 사랑 땜빵에 바치고 십자가를 짊어졌다. 부처도 자비라는 땜빵의 역할을 인류에 남기고 열반에 들었다. 풀 한 포기에서 사람에 이르기까지 아픈 곳을 어르고, 꺼져가는 등잔의 심지를 끄지 않으며, 갈대 하나에도 낭창한 허虛의 이치를 심어주고 스스로 땜빵에 든 사람들.

인간은 합리로만 해결될 수 있는 단순한 동물이 아니다. 현대는 산업화의 지적 우월주의로 인해 인간의 깊이에 무관심한 시대가 되었고, 감성은 상실되어 가고 있다. 즈음하여 우리 사회는 얼마나 많은 사람들이 땜빵의 역할보다는 주류가 되려 하는가. 그 주류를 위해 갖은 술수를 마다하지 않는 게 현실이다.

나는 선거 때마다 위정자가 되려 하는 위인들의 문화예술 공약에 관심이 많다. 결론부터 말하자면 그들의 문화예술에 대한 빈약한 열정과 지식에 아쉬움이 크다. 위정자로서 문학과 문화예술에 대한 무관심은 곧 인간애의 발로인 감성의 물꼬를 막는 것이며 자기 근원을 상실한 것과 다름 아니기 때문이다. 감성이 없는 인간은 그저 단순한 동물로 전락하고 말게 된다는 말이다.

노벨 문학상과 국가적 차원의 문학 박물관 하나 없는 대한민국의 문인들과 정치인들은 땜빵의 역할이 무엇인지 고민해야 한다. 21세기는 창의와 문화의 시대라고 한다. 이는 인간을 인간답게 하는 예술을 터부시해서는 안 된다는 것을 세계적 흐름이 잘 보여주고 있는 증표다. 이러한 인간애적 인문학을 바탕으로 한 문학, 문화예술의 깊이와 저변의 지원을 고민할 때 국익의 효과는 부차적으로 얻어진다는 사실을 알아야 하겠다.

사람에겐 지식적인 것뿐 아니라 情적인 요소도 중요하다. 인생을 깨닫는 데는 두 가지가 있다. 책을 통해 깨닫는 것과 주유천하 즉, 경험을 통해 깨닫는 방법이다. 한마디로 대자와 즉자의 관계로 비견될 수도 있겠다. 하여, 논리와 합리에 치우쳐 인간의 깊이를 잊어버리는 우리에게 情적인 부분은 시사하는 바가 크며 그것은 인간을 인간이게 하는 감성이다.

19세기, 키르케고르와 니체, 도스토옙스키 등 많은 철학가와 시인, 예술가들이 인간의 깊이를 찾아 헤맸던 것은 좀 더 새로운 이상세계를 꿈꾼 땜빵의 역할이었다. 이 시대도 인간 삶에 대한 깊이를 고민하는 문학 ․ 문화예술의 땜빵의 행위자들이 존중되어야 한다.

지방정치든 중앙정치든 앞으로의 리더는 문학, 문화예술에 관한 감성이 지극한 사람을 선選해야 한다. 그런 사람일수록 땜빵의 역할을 수행할 수 있기 때문이다. 우리 또한 서로에게 땜빵이 되어주는 삶을 스스럼없이 행할 때 살만한 세상이 되지 않겠는가.

글은 발효식품과 같은 것. 서둘러 쓴 글을 잠시라도 묵혀 둘 마음에 자판에서 손을 뗀다. 청탁받은 1,500자의 원고가 숙성되기를 바라며 아침에 따 놓았던 고추를 실러 손수레를 끌고 간다. 그새 더 농익은 고추잠자리 하늘을 높이고 볕은 이랑까지 들었다. 고추 부대를 옮겨 싣는다. 떨어트린 고추 하나까지 챙기고 두어 두럭 남겨진 고추에 눈이 간다. 마파람이 부는 것이 예사롭지 않다. 첫물을 다 따기도 전에 비라도 올까 걱정이 앞선다. 앞일을 미리 고민하는 내가 주춤주춤 어쩌지 못하고 서 있다. 내일 일을 당겨 걱정으로 바라보는 나를 내 안의 또 다른 내가 알아차린다. 과감히 돌아선다.

두고 온 원고의 문장들이 좁은 밭두럭까지 따라와 있다. 동네 모정 오래된 팽나무 이파리에도 매달려 있는 낱말들. 햇살에 자꾸 뒤챈다. 묵어야 하는 것이 어디 글뿐일까. 멀리 소울음소리가 아스라이 들려온다. 되새김질 같은 시간을 묵묵히 눈에 담아 묵히고 또 묵혔을 소의 울음. 그래서 소의 눈은 촉촉이 깊다.

고추밭에 다녀오는 동안 얼마나 숙성되었을까, 기대 반 설렘 반으로 원고를 들여다본다. 초고 때 드러나지 않은 허물들이 비어져 나온다. 수식관계가 마음 따로 몸 따로인 연인처럼 저만큼 떨어져 있다. 중언부언 복문은 연애의 속도감을 줄이고 소유격 조사는 단어와 단어가 지니는 동등성의 의미를 절감시키고 있다. 고친다. 추상적 어휘의 반복은 식상하고 관념적이며 일상에 회자되는 남의 말들이 진부하게 늘어져 있다. 또 고친다. 산문의 형식 또한 다분히 주관적이다. 그래도 이러한 수필의 형식은 고집한다. 획일화되어 가는 나를 경계하고 싶기 때문이다. 그러나 어설픈 전개 속을 헤매는 모습은 섧다. 어쩌랴 새참 같은 생, 잘나도 못나도 내 모습인 것을. 이제는 새참을 일어서야 한다. 다만, 부족한 부분은 독자가 회초리로 땜빵해 주길 바랄밖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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