의자에 대한 자세 / 이상수

 

의자는 풍경의 낙관이다. 산들바람 부는 드넓은 풀밭이나 파도소리 철썩이는 해변, 삶이 펄떡이는 시장 한쪽에서나 아이들 다 돌아간 운동장 귀퉁이에 놓인 의자는 지상에서 오래된 은유다.

앉음과 섬의 사이, 일과 휴식의 틈, 어제와 내일의 중간에 의자는 있다. 사막 같은 인생항로에서 지친 몸과 마음을 쉬어갈 수 있는 오아시스가 되어 준다. 두 다리를 가진 인간의 불완전함을 잠시나마 잊게 해주는 심리적 환각제요, 지음知音이자 인생을 함께 나누는 반려다. 다리는 세 개로 부족함이 없지만 개를 질투하여 네 개로 되었다는 장 그노소의 말은 너무 피상적인 접근법이라 불온하다.

초등학교 때 내 의자는 높아서 발이 바닥에 닿지 않았다. 게다가 청소를 하느라 책상 위에 올릴 때는 무거워서 언제나 힘에 부쳤다. 빌려 입은 옷처럼 졸업할 때까지 한 번도 몸에 꼭 맞는 의자를 만나지 못한 건 순전히 소극적인 성격 때문이었을 것이다. 그럴 때 의자는 내게 지극히 친근하지 못한 존재였지만.

덴마크사람들은 첫 월급을 타면 의자를 산다. 인생은 바꿔 말하면 시간이고, 그 시간을 보내는 곳은 공간이어서 안락한 의자는 생활의 질과 만족도를 높이기 때문이다. 몸에 지닐 물건을 사기보다 가족이나 친구를 위해 자리를 준비하는 그들의 중심엔 언제나 사람이 있다.

의자는 까다롭지 않다. 땅보다 높고 무릎보다 낮으면 무엇이나 의자다. 노인이 힘겹게 올라가는 계단이나 등산객이 쉬어가는 바위도 여차하면 앉을 자리가 되어준다. 베어버린 나무 밑둥치나 노점상 보따리도 마찬가지이다. 때와 장소에 따라 형태를 달리하지만 그의 속성은 언제나 자신을 기꺼이 내어주는데 충실하다. 한때 의자가 욕망을 상징한다고 생각하는 사람들이 있었다. 하지만 제가 가진 걸 남을 위해 쓸 줄 아는 선한 의지뿐이어서 신분에 따라 모양을 구분 짓는 저의는 애당초 없었다. 다만 인간의 욕심이 크기를 키우고 등받이의 높이를 올려 서열을 세우고 직함도 부여했을 뿐.

극작가 외젠 이오네스코의‘의자들’에는 사십여 개가 등장한다. 무대 위에는 보이지 않는 손님인 대령과 귀부인, 황제, 사진사와 미인이 앉은 의자가 있다. 실제 인물은 노인 부부와 변사뿐이다. 노벨평화상 수상자인 류사오보가 시상식에 참석하지 못하자 의자에 메달과 증서를 수여하기도 했다. 의자에 인격을 부여한 첫 사례가 아닌가 싶다.

의자는 밀가루 반죽처럼 말랑말랑하다. 긴장보다는 이완을, 분열보다는 통합을 부른다. 의자 위에서 사람들은 쉽게 느슨해지고 좀 더 솔직해진다. 차 한 잔을 마시고 싶을 때, 혼자 있고 싶을 때 나는 자주 베란다 의자에 앉는다. 낮의 소란과 자꾸만 겉돌기만 했던 친구와의 대화나 아침나절 괜히 투정을 부리고 출근한 남편의 일도 거기선 다 용서가 된다.

친정에 가면 팔순이 넘은 엄마는 허리가 아프다며 늘 흔들의자에 앉아 있다. 자꾸만 체격이 왜소해져서 거기에 묻힌 듯 보일 때가 많다. 어떨 땐 엄마가 의자 같고 의자가 엄마 같다. 남편을 위해 자식을 위해 자신의 모든 것을 내어주고 드라이플라워처럼 말라가는 중이다. 단 하나의 수분도 남아있지 않을 때 엄마는 그 품에 안겨 먼 곳으로 떠날 것이다.

의자는 이타주의자다. 그의 촉수는 언제나 타인지향적이다. 한 번도 저를 위해 자리를 준비하지 않는다. 남들이 더 많이 사용하는 내 이름처럼 뼛속까지 살신성인의 유전자를 타고났다. 어디 사람뿐이겠는가. 새나 다람쥐는 물론 바람이나 구름까지 쉬어가게 한다. 만물을 제품에 아우르는 것을 보면 최고의 도道는 물이 아니라 의자일지도 모른다.

가끔 늦은 밤 버스를 타고 귀가한다. 막차를 타고 가는 사람들은 어딘가 서로 닮아있다. 나이 든 노파거나, 옷차림이 후줄근한 중년의 남자이거나, 혹은 무거운 가방을 둘러맨 학생들이거나. 그럴 때 창가에 앉은 의자는 그들의 삶을 고스란히 받아준다. 시간의 쓸쓸함이나 밥벌이의 고단함이나 미래에 대한 불확실함을 막차의 의자만큼 이해해주는 이가 또 있을까. 그러니 삶을 알려면 막차를 타보라는 말은 진리이다.

언젠가 물 위에 뜬 의자를 본 적이 있다. 그럴 땐 망망대해를 건너가는 한 척의 배와 같았다. 우린 모두 태어날 때부터 자신의 의자를 가지고 세상에 나오는 건 아닐까. 의자에 앉아 빵을 먹고, 일하고, 연애하고, 의자에 앉아 생을 마무리한다. 우리가 어떤 사람의 생애를 정의할 때 그건 그 사람과 평생 함께한 그의 의자에 대한 이야기라고 생각하면 대체로 옳은 판단이다. 그의 의자가 얼마나 정직했는가. 날카로운 모서리가 둥글어졌는가. 타인에게 자신의 이익을 양보한 적이 있는가. 어떤 의자들과 만나고 어떤 의자를 멀리 했는가. 그리고 마침내 어느 해변에 닿았는가 하는.

헤르만 헤세의‘의자와의 대화’에서 화가가 되고 싶은 주인공은, 어느 날 다락방에서 발견한 등나무 의자를 그리지만 마음에 들지 않는다. 그는 이 세상 어떤 훌륭한 화가도 대상의 겉모습만을 묘사할 뿐이라는 걸 비로소 깨닫게 된다. 이 작품을 통해 헤세는 사물의 의미를 제대로 알기 위해서는 함께 깊어가는 시간이 필요하다는 것을 말하고 싶었는지도 모른다.

의자가 엎드린 채 견디는 것은 낙타의 숙명과 닮았다. 지도도 없고 미래를 예측할 수 없는 것은 인생이나 사막이나 마찬가지다. 낙타는 사막을 완성하고 의자는 풍경을 완성한다.

<에세이문학 2022년 가을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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