오이지를 먹으며 – 김훈
여름 점심때 잘 익은 오이지를 반찬으로 해서 찬밥을 막르면 입안은 청량하고 더위는 가볍다. 오이지는 새콤하고 아삭아삭하다. 오이지의 맛은 두 가지 모순된 국면을 통합한다. 그 두 개의 모순은 맛의 깊이와 맛의 경쾌함이다. 이 양극단의 모순이 한 토막의 오이 속에서 통합되는 비밀을 나는 설명할 수 없다. 짐작건대 이것은 소금과 물과 오이가 항아리 속에서 스미고 배어서, 새로운 맛으로 태어나는 모든 과정을 ‘시간’의 섬세하고 전능한 작용이 종합관리함으로써 가능한 것이지 싶다. 잘 익은 오이지는 오이의 신선함 속에 밴 간의 깊이와 소금에 순응하면서 더욱 새로워진 오이의 산뜻함이 한 토막의 채소 속에서 어우러지며 한바탕의 완연히 새로운 맛의 세계를 펼치는 것인데, 이 맛은 오이나 소금 속에 지금까지 없었던 것이다.
그 항아리 속의 비밀을 경영하는 것은, 아마도, 틀림없이, ‘시간’의 섬세하고 전능한 손길일 것이다. 시간은 우주의 운행과 역사의 흥망성쇠, 중생의 생로병사, 별들의 생성과 소멸뿐 아니라 김칫독, 된장독, 고추장독, 젓갈독 안의 비밀까지도 두루 관장하면서 ‘있음being’에서 ‘됨becoming’으로 사물을 전환시키는데, 그 신적神的인 작용이 가장 선명하고 육감적으로 드러나는 곳은 단연코 오이지 항아리 안이다. 오이지 항아리 속 전환의 진행방향은 그 놀라운 단순성인데, 오이지는 단순성을 완성해가면서 깊어지고 깊어져서 선명해진다.
오이지 항아리 안을 찾아오는 시간은 경험되지 않은 미래의 시간이다. 지나가버린 시간 위에서는 오이지를 담글 수 없다. 오이지뿐 아니라 노래를 부를 때, 악기를 연주할 때, 그림을 그릴 때, 자전거를 탈 때도 마찬가지이다. 오이지는 다가오는 시간의 경이로운 작용을 음식의 맛으로 표현해서 사람의 몸속으로 넣어준다. 오이지는 미래의 시간을 받아들여서 스스로 변하고, 그 변화 속에 지나간 시간을 갈무리한다.
오이지를 먹을 때, 나는 시간과 더불어 새로워지는 삶을 생각한다. 오이지를 먹을 때, 나는 다가오는 시간과 지나간 시간이 생명 속에서 이어지는 경이를 생각한다. 오이지를 먹을 때 나는 도공의 가마와 대장장이의 화덕과 연금술사의 램프를 생각한다. 오이지를 먹을 때, 나는 지금 도 도산서당에 계실 것만 같은 퇴계의 무말랭이를 생각한다. 무말랭이는 햇볕을 말려서 먹는 반찬이고 오이지는 시간을 절여서 먹는 반찬이다. 그 반찬 속에서 삶의 미립자들은 반짝인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