흐린 날과 맑은 날 / 맹난자


쾌청하게 맑은 날은 맑아서 좋고, 우울하게 흐린 날은 흐려서 좋다. 비 오는 날, 비에 갇혀 하릴없이 흐려진 창 앞에 우두커니 서면 안개비와도 같은 음악의 선율이 내 마음속에서 피어오른다.


대체로 이런 날은 첼로의 음반을 걸게 된다. 막스 브르흐도 좋고 바흐의 ‘G선상의 아리아’도 좋다. 첼로의 G선은 때로 사람을 영적(靈的)으로 만들고 심신을 편안한 이완의 상태에 머물게 한다.


따라서 맥박도 느려지고 호흡도 진정되어 깊은 선율 속으로 침잠하게 된다. 마치 지하 동굴의 계단을 따라 깊숙이 내려가면 거기 어느 신(神)적인 존재와 만나게 될 것도 같다.


비는 곧잘 사람을 회고적(懷古的)으로 만든다. 비밀 서랍 속에서 동경(銅鏡)을 꺼내 들고 본래의 자기 모습을 점검하는 엄숙한 제의(祭儀) 같기도 한순간이다. 묵은 수첩을 들추며 이것저것 반조와 상처로 이어지는 시간, 밀쳐 두었던 책에 손길이 가닿는 날도 바로 이렇게 축축하게 젖은 날이다. 애써 모아 온 허섭스레기가 하찮아지며 생의 비본질적인 것에서 다소 벗어나게 되는 경우도 바로 이런 때다.


그래서 음악가 중에 철학자가 많은 것인지도 모르겠다. 깊숙하게 의자를 당겨 앉은 채 두꺼운 돋보기를 방금 읽던 책 위에 걸쳐놓고, 잠시 호흡을 고르는 키에르케고르의 모습도 그려진다.


비가 아니더라도 집에 갇혀 평생 외출을 모른 채 책상 앞에서만 보낸 칸트의 모습도 따라온다. 침잠과 우울, 비의 내성성(內性性)이 사람을 철학적으로 이끄는 힘을 갖고 있는 것일까.


나같이 어쭙잖은 사람도 이런 날에는 사색의 숲을 서성이고 싶어진다. 눈으로는 빗소리를 보며 마음은 흐르는 선율에 맡긴 채 흐려진 창 앞에 우두커니 서 있어 보는 한유도 이런 날에만 누릴 수 있는 특권이 아니겠는가. 그러나 어찌 우리 인생에 흐린 날만 있겠는가? 포도줏빛 넘실대는 지중해의 검푸른 바다 위로 쏟아지는 강렬한 햇빛. 금빛 물결로 부서지는 눈부신 오후. 누가 부르지 않아도 마음은 밖을 향해 내달린다. 외향성과 해바라기, 생명들은 소리쳐 환호한다.


화가들은 불굴의 의지로 땡볕 아래서 붓질을 멈추지 않는다. 그래서일까. 실명한 화가들―모네, 르누아르, 도미에, 드가―이 있는 프랑스는 더욱 회화적이며 문학적인 것 같다. 반면 슈만과 브람스, 바흐와 베토벤이 있는 독일은 좀더 음악적이며 철학적인 것 같다.


나는 시방 비의 내성성과 햇볕의 외향(外向)성에 대해 생각해보는 중이다. 둘의 상보적인 보완 관계. 어느 한쪽만 고집해서도 안 될 것 같다. 가을날 찬비를 맨몸으로 맞은 싫은 기억도 있지만 그래도 흐린 날은 흐린 대로, 맑은 날은 맑은 대로 좋다.


사실 어느 날이라도 다 지낼 만하지 않던가.