붉게 노을 진 눈빛이다. 눈꺼풀이 바르르 떨리며 양미간이 흠칫 놀라 움찔거린다. 천둥 번개 같은 예고는 없다. 가슴이 갑자기 후끈 달아오르는가 싶으면 목울대가 느닷없이 울컥거린다. 새벽안개 자욱한 샘물이 눈시울을 흐리며 벌써 차고 넘친다. 눈동자를 따라 핑 돈 눈물이 연잎에 구르는 이슬방울처럼 주르륵 흘러내린다. 고개를 돌리고, 코를 훌쩍이며 딴짓을 해도 소용이 없다. 눈물은 원래 눈치가 없다.

눈물을 자주 흘리는 편이다. 생체 노화로 눈물샘을 자극하는 부교감신경이 둔해지고 눈물관이 좁아지면서 일어나는 현상인 탓도 있다. 하품하거나 안구보호를 위해 자연적으로 나오는 본능적인 눈물을 말하는 게 아니다. 슬픔과 기쁨, 공감과 감동, 분노와 고통 등 감정의 변화가 시도 때도 없이 눈물과 함께 따라온다.

어릴 때도 눈물이 많았다. 나를 미워하는 것 같아 서러워서 눈물이 나고, 며칠 함께 지내다 헤어지는 친구는 그리워서 눈물이 났다. 사나이 대장부가, 집안에 든든한 기둥이 되어야 할 장남이 그렇게 마음이 여려서 어떡하냐고 부모님이 혀를 찼다. 차라리 경쟁에서 지고 분한 마음에서나, 극한 어려움을 참고 견뎌낸 강단 있는 눈물이라면 대견해했을지도 모른다. 야무졌던 사촌 동갑내기를 닮으려고 노력도 해보았지만 천성난개(天性難改)였다. 역시 부모님의 걱정대로 세상 큰소리 한번 쳐보지도 못하고 소박한 행복에 만족하며 산다.

젊어서 눈물이 더 큰 문제였다. 자기 행동 하나하나가 온전한 인격체의 표상이 되는 성인의 눈물은 우선 남이 볼까 봐 궁상맞은 일이었다. TV나 영화를 보다가도, 친구나 직장동료와 대화 중에도, 책을 보거나 무슨 공상을 하다가도 주책없이 눈물이 나왔다. 이성적인 학습은 숨겨진 감성의 본능을 제어하기에는 무리였다.

다행인 것은 무섭거나 슬프다고, 사는 게 힘들다고 나를 위한 눈물을 흘리지는 않았던 것 같다. 개인적인 희로애락 앞에서 원시적인 감정선도 아니고, 마지막 자존심도 아니고, 내 입장을 호소하는 하소연도 아니었다. 사람들이 살아가는 모습, 그저 인간의 아름다운 행동에 대한 몰입에서 나오는 눈물이었다.

인정(人情)을 잃어버리면 인간은 고독해진다고 했던가. 눈물은 타자의 슬픔에 동참하고 연대를 이루는 기표이자 상징이다. 불쌍한 사람에 대한 연민과 동정의 감정은 인간인 이상 누구나 가지고 있다. 공동체 사회의 동행자로서 휴머니즘적인 사고와 행동들, 국가를 위해 의롭고 거룩한 행위나 애국심, 가족 간의 뜨거운 헌신과 사랑하는 모습, 사회적 책임감이나 희생심을 발휘한 사람에 대한 눈물이 매번 눈시울을 훔치게 했다.

나도 누구에겐가 그런 의미 있는 사람이 되고 싶었다. 주변의 모든 이에게 배려와 호의를 베풀 줄 아는 순하고 선한 사람으로 살고 싶었다. 장미보다 안개꽃처럼 나 아닌 누군가를 빛나게 하는 배경이어도 괜찮았다. 이해관계 없이도 사랑과 의리를 먼저 알고, 제 몸이 상하는 줄도 모르고 무의식중에 뛰쳐나갈 수 있는 그런 순수함이라면 더욱 좋았다. 양보심 많은 순한 인상도 좋지만, 무엇보다 배려심 깊은 선한 눈빛을 갖고 싶었다.

선하고 순하게 산다는 것이 쉬운 일이 아니다. 늘 입으로는 옳고 바르게 사는 삶을 외쳤지만 실상 마음과 행동은 그러하지 못했다. 그저 동정이나 연민 정도에 머물렀을 뿐이지 주변 사람들과도 이해관계를 앞세워 경계심과 이기심에 매달려 살았다. 조그만 손해에도 불신과 반목으로 돌아서고, 조그만 상처에도 분노와 증오심에 잠겨 불협화음이 되기 일쑤였다.

사람마다 사는 방식이 다르다. 모두 자기의 방법대로, 몸에 익숙한 대로 살아간다. 눈물 한 방울 없이도 세상 요령과 재주로 재미를 붙일 수도 있겠지만 또 누군가는 감사와 양보가 없는 사회가 불안정하고 불편하게 느껴질 수도 있는 일이다. 논리와 이치를 따지기에 앞서 인간적인 감동이, 문명의 편리함에 앞서 사람다운 문화를 꿈꾸는 사람도 분명 더 많이 존재하고 있는 것은 분명하다.

나이가 들었다. 종종 지난 일을 되돌아보고 추억에 잠기는 경우가 많아졌다. 덩달아 눈물도 늘어났다. 그만큼 세상을 바라보는 눈도 관대해지고 온전해졌는가 싶었는데 사실은 그게 아니었다. 남과 이웃, 사회와 세상을 향한 눈물이 아니라 실상은 나를 위해 흘리는 눈물이었다. 그동안 살아온 과정이 어렵고 힘들어서, 가족들에게 미안하고 고마워서, 궁색한 노후가 처량하고 외로워서 나오는 눈물이었다. 어쩌면 열심히 살아온 자신에게도 한 줌의 위로가 필요했는지도 모른다.

하지만 그것은 따뜻한 눈물이 아니었다. 아무리 닭똥 같은 눈물을 흘려도 내 집, 내 삶, 나를 위한 눈물에는 매력도 없고 감동도 없었다. 나밖에 모르고, 대우받으려고 하고, 내 삶을 합리화하려는 자의식에서 나온 눈물이었다. 남이 내 인생을 알아봐 주기를 기대하는 자서전 같은 눈물은 자기 미화이며 허세일 뿐이었다.

손수건은 누군가의 눈물을 닦아주기 위해 준비하는 것이라고 한다. 누군가의 삶을 통해 ‘나’를 발견하고 서로에게 힘이 되는 존재가 될 수 있다면 무엇보다 가치 있는 눈물이 아닐까 싶다. 이어령 교수도 ‘눈물 한 방울 없는 이기적인 사람들이 분노와 증오, 저주의 어지러운 사회를 만들고 있다.’라고 임종 전까지 안타까워했다.

눈물이 많은 것이 흠이 될 수는 없다. 눈물이 없는 사람이 의지력이 강해 보이기도 하지만 눈물이 많다고 세상살이가 결코 나약한 것도 아니다. 인디언들의 경구가 있다. ‘눈물이 없는 자의 영혼에는 무지개가 뜨지 않는다.’ 그렇다면, 더 많이 울어본 사람이 더 많이 반짝인다는 말도 사실이 아닐는지?

<수필세계 2022 여름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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