멸치 / 이윤경

 

택배로 상자 하나가 들어왔다. 곱게 쌓인 보자기를 풀었다. 나무로 된 상자 속에는 얌전하게 한지를 깔고 은빛 멸치가 가지런히 담겨 있었다. 묵직하고 반듯한 나무상자 속에서 멸치들은 눈을 동그랗게 뜨고 입을 앙다물고 누워있다. 흠 없고 온전한 은빛 비늘 사이로 물을 튕기며 금방이라도 살아 움직일 것만 같다.

멸치들은 나무 상자 속에서 줄까지 가지런히 참하게 서있다. 발레리나의 발끝처럼 바짝 긴장된 자세를 취한 멸치 떼가 내뿜는 은빛으로 눈이 부실 지경이다. 바다에서 식탁까지 파란의 먼 길을 헤엄쳐온 놈들 치고는 지나치게 꼿꼿하고 흠집 하나 없이 말끔하다. 이놈들은 자신이 갇혔다는 사실도 몰랐을 것이다. 저리 온전하게 제 몸을 건사한 걸 보면. 그물에 걸려서 빠져나가려고 할수록 서로를 옥죄고 그러다 만신창이가 되어 눈이 희멀겋고 비늘이 덕지덕지 떨어져 나간 부류들과는 다른 품격이 느껴진다.

나무상자에 흘림 글씨체로 남해 죽방멸치라고 떡하니 쓰인 걸 보고서야 귀하신 몸이란 걸 알아챘다. 얄미우리만큼 말끔한 놈을 하나 골라 머리 째 씹는다. 비리지 않고 단단하지 않아 쉽게 부서지지도 않고 적당하게 쫀득거린다. 입안 가득 남해의 짭짤한 바다 냄새가 고인다. 시장에서 사 온 헐 찍한 멸치 한 박스를 헐어서 다듬다 보면 더러는 대가리도 떨어지고 비늘도 너덜너덜 거린다. 종이 상자에 담긴 서민적인 멸치만 보다가 귀족같이 초름하고 잘 빠진 놈들을 뼈째 씹자니 황송하기까지 하다.

지난봄, 남해로 여행을 다녀온 적이 있었다. 푸른 바다가 내려다보이는 금산 보리암과 바다를 가르는 길고 멋진 다리, 그리고 처음으로 본 낯선 풍경이 죽방렴이었다. 날개를 편 갈매기 형상의 나무 구조물들이 푸른 물결 사이로 드문드문 서있었다. 그곳이 물고기를 가두어 잡을 수 있도록 고안된 구조물임을 설명을 듣고서야 알았다.

가두는 것은 인간이 만든 도구이며 수단이고, 그 안에 갇히는 것은 필요이며 목적이다. 자연 친화적이고 원시적인 이 도구는 고대 채집 생활의 유물이 진화된 것이리라. 자연을 거스르지 않으면서도 적절히 이용했던 조상들의 지혜가 과학문명이 발전된 오늘에도 빛을 발하고 있었다. 촘촘히 박아 놓은 나무 말뚝 사이로 물살에 떠밀려 들어온 물고기들은 살아서는 빠져나가지 못하는 덫에 걸려든다. 죽방렴 안의 멸치 떼는 유유히 물살을 저으며 그 안에서 무리 지어 헤엄쳐 다닌다. 갇혔을지언정 그 몸을 에워싼 맑은 빛을 잃지 않는다.

떼를 지어 바다를 누비던 멸치들은 잡히는 과정에서 그 운명이 달라진다. 나무 상자에 담겨 백화점 진열대에 있거나, 종이 박스에 마구 뒤섞여 시장의 좌판에 있거나. 어선에서 내린 투망에 싹쓸이 끌어당겨진 멸치들은 좁은 그물 안에서 빠져나가려고 서로 부대끼고 뒤섞인다. 그 안에서 살아보겠다고 서로를 짓누르고 상처를 낸다. 그 광경은 멸치에게는 아수라장이다. 그물이 찢어질 듯 멸치로 가득 차 배 위로 당겨 올라오면 어부들이 줄을 지어 그물을 턴다. 그물이 털썩거릴 때마다 공중으로 솟구쳐 오르면서 은빛 비늘이 조각조각 떨어져 나가고 허공에서 몸이 찢겨 떨어져 흩어지기도 한다. 춤을 추듯 공중으로 튀어 오르는 붉은 살점들을 향해 갈매기의 날쌘 부리가 순식간에 달려든다.

건져 올린 멸치는 산 채로 펄펄 끓는 가마솥으로 옮겨진다. 삶기는 과정을 거치고서야 풍미 깊은 맛으로 오래도록 보관할 수 있다. 솥 안에서 투명하게 익어가는 동료들의 모습을 눈뜨고 지켜보며 뼛속까지 스며드는 뜨거운 기운을 멸치는 온몸으로 받아들인다. 모든 것은 순식간이다.

우리 삶의 모습 또한 그물에 붙들린 멸치 떼와 별반 다르지 않다. 자신이 살아남기 위해 서로를 짓밟고 밀어낸다. 한번 밀리면 생사를 장담할 수조차 없는 아수라장 같은 역사의 소용돌이 속에서 곧고 바르게 제 몸과 마음을 건사하기란 쉽지 않은 일이다. 제 의지와 상관없이 운명이 갈리기도 하고 상처받고 찢기기도 한다. 어머니의 품과 같은 바다에서 벗어나는 순간, 멸치에게는 고난의 길이듯 내가 서 있는 세상도, 나의 운명도 작고 여린 한 마리 멸치와 다를 것이 없다.

멸치가 최고의 상품이 되려면 마지막으로 말리는 과정이 중요하다. 삶은 멸치는 나무로 만든 건조 발에 떠서 부둣가의 갯바람과 햇살 아래 펴 말린다. 너무 바짝 말리면 쉽게 부스러져 상품 가치가 떨어지고 덜 말리면 보관하는 과정에서 썩기가 쉽다. 무슨 일이든 적당하기란 쉽지 않은 일이다. 최상의 상품을 만드는 것은 그렇게 수고롭고 손이 많이 가는 일이다.

은빛 비늘을 반짝이며 멸치가 해풍에 꼬들꼬들 말라가고 낙조가 흥건하게 남해 바다를 적셨다. 그 순간의 색의 대비는 아름다움 보다 차라리 경건에 더 가까웠다. 하늘과 바다가 한 덩이가 되어 붉게 물들어 가는 순간을 붙들어 두고 싶었다. 바다에 잠시 머문 노을을 죽방렴에 가두어 보려 해도 노을은 출렁이며 이내 바다를 빠져나갔다.

상자에 누운 멸치가 반갑다. 오래도록 여운처럼 길게 남아 있던 남해 바다의 풍경이 멸치와 함께 상자 속에 그대로 담겨온 듯하다. 멸치의 은빛 비늘 사이로 그때의 노을빛이 어른거리고 바다 냄새가 일렁거린다. 상자는 멸치를 가둔 것이 아니라 그 가치를 더 빛나게 해준다. 멸치가 지나온 길에 따라 담기는 상자가 달라진다. 명품이 되느냐 싸구려가 되느냐 멸치를 씹으며 생각한다.

나의 삶을 수식하고 포장해 주는 상자는 내가 걷는 길에 따라 달라질 것이다. 내가 가진 비늘을 온전하게 살리고 뜨거움과 바람과 빛을 견디다 보면 언젠가는 반듯하고 묵직한 상자가 내게도 주어지지 않을까. 멸치 대가리를 떼어 내려다가 그것도 아까운 생각에 그대로 두기로 했다. 남해바다에서 여기까지 저리 온전한 모양으로 온 것을 배를 가르고 대가리를 떼어 내는 게 미안한 생각이 든다. 양념도 하지 않고 통째로 꼭꼭 씹어 먹을 생각이다. 입안에 가득 고이는 바다 냄새를 그대로 느끼면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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