부재지주(不在地主) / 반숙자
들에 나가보면 한눈에 알아볼 수 있다. 밭을 갈아 이랑을 만들고 고추를 심던가, 담배를 심은 밭들은 벌써 이식한 모종들이 몸살을 끝내고 땅내를 맡아 기름이 잘잘 흐르나 망초만 길길이 푸른 곳은 부재지주들의 밭이다.
어디 농토뿐인가, 시골 마을 외돌아진 곳이면 빈집이 한두 채 있기 마련이다. 한 때는 윤나게 가꾸었을 부엌이며 마루에 먼지가 쌓여 있고 식구들의 웃음소리가 새어나왔을 방에는 문짝이 떨어져 나가고 거미줄만 을씨년스럽다. 사람들이 살다 떠난 집에서는 이상하게도 괴괴한 냉기가 돈다.
한동안 땅값이 치솟을 때 농부들은 대대로 내려오며 농사를 짓던 땅들을 팔아버리고 도시로 나갔다. 명분은 있다, 자녀들 교육과 농사로는 생존이 어려운 현실을 타개해 보자는 강구책이다. 또한 나이 들어 농사를 지을 힘이 없어진 사람들은 노후의 생활을 위해 아까운 땅을 팔고 텃밭만 가꾸는 이들이 적잖다. 하여 우리 집 주변의 밭들이 지금 호랑이 새끼 치게 생긴 것은 고사하고 그 밭에서 자라 씨가 되어 날아온 엉겅퀴나 망초들로 골치를 앓고 있다.
어떤 밭은 경작할 사람에게 임대를 하여 부치는 일도 있다. 바로 우리 위 밭이다. 사과나무를 심은 그 밭 임자는 바빠서 돌보지 못해 다른 사람이 과수 농사를 짓는데 수확을 하고 난 빈사과 봉지와 색깔을 내기 위해 나무 밑에 깔았던 은박지들이 밭둑에 방치돼 있어 바람에 사방으로 날아와 공해를 일으키고 있다. 이 밭도 부재지주의 전형이다.
부재지주는 법률상으로는 주인이 있으나 농사를 짓지 않는 땅을 말한다. 그 중에는 부동산 투기로 이익을 보려는 사람도 있을 것이고 나중에 은퇴하고 집을 지어 살려고 준비해 둔 사람도 있을 것이다. 사람에 따라 다르겠으나 현재 농토를 놀리고 있는 상황은 똑같다.
올 봄을 청소하는 일로 보냈다. 윗집 사과나무 빈 봉지들이 바람 따라 날아와 뜰이고 나무 밑이고 할 것 없이 쌓여 있어서 끄집어내어 태우고 며칠 있다가 농장에 가면 또 그 지경이 되어 있는 것이다. 위집 밭둑을 몽땅 태워버리고 전에는 끝이 나질 않을 것 같다. 하루는 생각 끝에 불을 놓아 태우려고 했더니 아래 밭 농부가 바로 뒤가 산인데 산불이 나면 어쩌려고 그러느냐고 극구 말렸다. 부재지주가 내게는 애물단지다. 나중에 집을 지어 이사를 오면 정다운 이웃이 될 사람들인데 그동안이 문제다.
꽃 찬란하고 잎 찬란한 봄을 쓰레기 줍는 일로 보내면서 부재지주는 토지에 한한 것만 아니라는 생각이 들었다. 내 몸의 주인은 누구인가에 생각이 미친다. 분명 내 몸의 주인은 나다. 특히 내 육체의 주인은 나라서 육체가 원하는 일들에 열심히 매달렸다. 육신이 노곤하고 하면 바로 따뜻한 침대로 오르고 육신의 배가 출출하다하면 냉장고 문을 열었다 닫았다하면서 충성을 다하여 입맛을 맞춰주었다. 이 몸이란 게 어찌나 요사스러운지 침대에 누워 쉬노라면 더 따끈한 찜질방이 생각나고 온갖 미각을 채워주고 나면 입맛이 없다고 투정이다. 육체를 다스리려면 오감을 극복해야하 는데 되질 않는다.
어찌 육신뿐인가, 더 큰 문제는 바로 마음이다. 마음이란 거는 눈에 보이지도 않고 만져지지도 않는데 발휘하는 힘은 놀랄 만 해서 사람을 죽였다가 살렸다가 한다. 순간순간 변하고 종잡을 수 없는 마음, 그릇에 담으면 그릇 모양이 되고 땅에 쏟으면 흙으로 스며들어 정체를 감추나 분명 어디엔가는 존재하는 물 같은 것이 아닌가 싶다.
요즘 매스컴에서는 동반자살자들 기사로 시끄럽다. 자살사이트가 있어 거기서 만나 의기투합하여 동반자살을 꾀하는 사람들, 이들은 유서를 "자의로 갑니다"라고 남겨놓고 있다. 누가 시키지 않고 스스로 원해서 하는 짓이라고 강조한다.
그런 뉴스를 시청한 날에는 영락없이 부재지주가 떠오른다. 몸은 있으나 확실한 주인이 없어 결국에는 하나 밖에 없는 목숨을 내팽개쳐버리는 것 아닌가. 목숨이 내 것이기 전에 나를 창조한 사람들이 있다. 바로 부모다. 어떤 부모가 자식이 스스로 목숨을 끊는 일을 원하는가, 차라리 자신이 죽더라도 자식이 살아 주기를 바라지 않는가.
더 나아가서는 이 세상을 창조한 진짜 주인을 생각한다. 그 분은 아무 대가없이 우리를 사람으로 창조하셨다. 인간의 유전자를 총괄하고 모든 수단을 동원하여 생명을 주신 분이다. 그런데 감히 누가 제 몸이 제 것이라고 함부로 결단을 내려하는가.
부재지주들 덕분에 쓰레기 태우고 엉겅퀴 캐는 일로 봄 한철을 보냈다. 그러면서도 아기자기하게 가꾼 우리 농장에서 아무리 부실해도 내 몸과 마음의 확실한 주인으로 살고 싶은 나는 오늘이 고맙고 황송할 따름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