기찻길 / 이정림

 

 

 

우리 집 옆으로는 기차가 다닌다. 한 시간에 한 번 기적을 울리며 기차가 지나가면 나는 얼른 하던 일을 멈추고 베란다로 나간다. 그리곤 십삼 층에서 멀리 아래를 내려다본다. 알록달록한 꽃무늬까지 그려져 있는 기차는 누가 쳐다보지 않을까 봐 안달하는 아이처럼 낮게 기적을 울리며 지나간다.

어쩌다 기찻길을 끼고 산책을 하다 보면 때마침 오가는 기차와 마주칠 적이 있다. 낮 기차에서는 나들이 떠난 사람들의 즐거운 웃음소리가 새어나오는 것 같다. 모처럼 가벼운 마음으로 타 보는 기차는 사람들의 기분을 한결 고조시키지 않던가. 그러나 밤기차는 밖으로 내비치는 그 불빛으로 인해 한층 고즈넉한 느낌을 준다.

커피 한 모금 물고 창밖을 내다보고 있으면 나는 기차에 앉아 먼 여행을 떠나는 나를 상상하게 된다. 미지의 세계를 찾아가는 설렘과 두려움은 내 신경을 언제나 싱싱한 긴장감에 휩싸이게 한다.

고향은 낯선 곳이 아니지만 기차를 타고 내려가는 고향은 언제나 새로웠다. 어린 시절, 고향에 내려가려면 어머니는 꼭 새벽 기차를 탔다. 잠이 덜 깨 꾸벅꾸벅 졸고 있노라면 둔중하게 돌아가는 바퀴 소리가 끊임없이 귓가에 들려 왔다. 그러다 갑자기 왁자지껄한 소리에 놀라 눈을 떠보면 아주 새로운 세상에라도 온 듯 기차 안 풍경이 낯설었다. 김밥을 사라고 다투듯 소리를 지르며 지나가는 사람들, 천안 명물 호두과자가 왔노라고 목소리를 길게 끌며 지나다니는 사람들, 그 밖에도 계란이며 과일이며 별의별 먹을 것들을 잔뜩 가지고 올라온 장사꾼들로 기차 안은 북새통을 이루었기 때문이다. 그 중에서도 나는 나무 도시락에 담긴 김밥이 가장 먹고 싶엇지만 그것은 마음뿐 한 번도 사 먹어 본 적이 없다. 새벽 기차에 처음으로 장사꾼이 올라오던 바로 그 역에서 어머니를 따라 서둘러 내려야 했기 때문이다.

일 년 전에 이곳 '기찻길 옆 오막살이' 로 이사를 했다. 입주 날짜를 기다리며 내가 살게 될 집과 새로운 동네를 익히려고 틈만 나면 지도를 들여다보았다. 그런데 우리 집 바로 옆으로 기찻길이 나 있는 것이 보였다. 기차를 가까이에서 볼 수 있다는 것은 낭만적인 생각이 들어 좋았지만 기적 소리가 크게 들리지 않을까 그것이 걱정이었다. 그러나 막상 이사하고 보니 그것은 공연한 기우杞憂였다. "기차 소리 요란해도 아기 아기 잘도 잔다"는 동요도 있는데, 기차 소리 요란하지 않은데 잠이 깰 아기는 없어 보였기 때문이다.

비 오는 날 낮게 울리는 기적 소리는 마음에 평화로운 느낌을 안겨 준다. 저녁때 그 기적 소리를 들으면 굴뚝에서 밥 짓는 연기가 피어오르는 조용한 산골 동네를 연상케 한다. 그리고 나같이 여행할 시간을 쉬이 내지 못하는 사람에게는 상상의 길을 떠나도록 부추긴다. 나는 그 기차를 타고 어디든지 간다. 내 유년 시절이 아직도 추억 속에서 살아 숨 쉬는 고향, 나와 얼굴이 다른 사람들이 생활하고 있을 낯설고도 먼 미지의 땅, 그리운 이들이 죄다 신선이 되어 지내고 있을 하늘나라에 이르기까지 그 기차에 오르면 가지 못 할 곳이 없다. 기차는 나를 태우고 시공時空을 넘나들며 현실 속에서는 이룰 수 없는 내 갈망들을 축여 주는 것이다.

이 경의선京義線기차는, 조금 있으면, 더는 갈 수 없을 것 같던 문산汶山역에서 끊어진 기찻길을 이어 개성으로 평양으로 달려간다. 더 이상 "철마는 달리고 싶다"는 비감한 호소를 하지 않아도 될 날이 꿈처럼 다가오고 있는 것이다. 그때는 나도 상상 속에서가 아니라 운동화 끈 질끈 매고 여행을 떠나리라. 내겐 아프리카보다도 더 낯설고 새로운 땅, 그 땅의 흙을 직접 밟아 보리라. 그리고 억양이 높고 투박한 사람들, 옛날 사진첩에서 본 언니의 젊었을 때 모습과도 비슷한 그 순박한 사람들을 만나 보리라.

그런 날이 의외로 빨리 올지도 몰라, 오늘은 한 발 앞서 그 기차를 타 보리고 했다. 지금은 겨우 다섯 량밖에 안 되지만 앞으로는 열 량 스무 량 객차를 달고 이 기차는 남북을 넘나들며 달리게 될 것이다. 서울말과 평양 말, 충청도 말과 평안도 말, 전라도 말과 함경도 말이 한데 뒤섞여 "반갑습네다!" 하는 인사말을 주고받게 될 바로 이 기차에 앉아 나는 지금 우리가 하나 되는 날이 머지 않았음을 느낀다.

기찻길은 언제나 새로운 땅을 찾아가는 사람들의 열망으로 놓여진다. 그 길을 따라 사람들이 오가다 보면 마음도 오고 인정도 간다. 기차는 사람도 나르고 물건도 나르고 마음도 나른다. 기차는 순환선循環線이다. 떠나서 돌아오지 않는 사람은 있어도 떠나서 돌아오지 않는 기차란 없기 때문이다.

지금부터 나는 그 기차를 타고 평양과 신의주를 거쳐 유라시아 대륙으로 달려가는 꿈을 꿀 것이다. 기적이 아무리 크게 울려도 그 행복한 꿈에서 나는 깨어나지 않으리라. "리 선생, 이제 그만 일어나시라우요!" 하는 그 반가운 음성이 들릴 때까지.

 

profile