하얀 진달래


이정림


무료하여 저녁 산책을 나가던 길이었다.
그런데 집 앞 화단에서 나는 어떤 꽃들이 나를 잡아당기는 것 같아 가던 걸음을 멈추고 뒤를 돌아보았다. 그것은 하얀 진달래였다. 진달래 하면 으레 분홍색인줄만 안 내 상식에서 하얀 진달래는 신선하고 아름다운 충격이었다. 그리고 그것은 환한 대낮이 아닌 으스름한 저녁에 피어있는 탓으로 그 흰 빛깔이 유난히 내 시선을 끌었는지 모른다.

나는 발길을 돌려 그 꽃 앞으로 갔다. 그리고 노인처럼 허리를 굽히고 한참동안 그 꽃을 들여다보았다. 틀림없는 하얀 진달래였다. 아니 학명으로는 철쭉이라고 불 리울지도 모른다. 그것은 진달래도 철쭉도 아닌 전혀 상관없는 이름의 꽃일지도 모른다. 그러나 이름 같은 것은 아무래도 상관없다. 그 꽃이 내게 다가온 것은 이 름이 아니라 그 빛깔이었기 때문이다.

화단에는 하얀 빛깔이 쓸쓸하리만큼 무리 지어 있었다.흰 빛깔은 원래 쓸쓸하게 마련이지만, 그것이 더욱 쓸쓸하게 느껴지는 것은 때가 어두워지는 저녁 무렵이어서 일까. 아니면 내 마음이 늘 채워지지 않는 구석이 많아서일까.

나? ?문득 그 흰 빛깔에서 큰언니의 옥양목 적삼을 떠올렸다. 언니는 그날 하얀 옥양목 적삼을 입고, 머리는 양 갈래로 땋아 둥그렇게 올려 한가운데에서 단정하게 묶고 있었다. 그때 언니의 나이는 스물이 조금 넘었을 것이다. 그런데 한창 피 어나던 성숙한 언니 비해 나는 겨우 열 한살의 막내에서 언니와 나는 마치 모녀지 간 같았다.

나는 아버지 산소 앞에 있는 커다란 돌에 걸터앉아 사진을 찍었고, 언니는 돌 뒤에서 내 한쪽 팔을 잡고 새색시처럼 조신한 표정을 지었다. 그 사진을 찍어준 사 람은 큰오빠였을 것이다. 사진은 그다지 선명하지 않으나, 그 날 그 사진을 찍었던 화창한 여름 날씨는 아직도 내 기억 속에 선명하게 남아 있다.

짧은치마 밑으로 늘어진 내 다리가 유난히 길어 보인다. 그 다리 탓일까. 훗날 내 키는 언니보다 훨씬 커졌지만 그래도 언니는 언제나 내 마음속에서 언제나 나보 다 큰 어른이었다. 그 날 나는 언니가 만들어준 포플린 원피스를 입었다. 그 당시 는 원피스라 하지 않고 간단복이라고 했는데, 분홍 줄무늬가 바둑판처럼 그어진 가 볍고 예쁜 옷이었다. 그리고 어깨 끈에는 커다란 단추가 두개 모양으로! 달려 있었 다.

어머니는 구식 분이어서 새로운 것에 대해서는 잘 알지 못했다. 그래서 어머니 가 못하시는 몫을 자연히 큰언니가 떠맡게 되었다. 아버지가 안 계신 집안에서 큰 언니가 떠맡게 되었다. 아버지가 안 계신 집안에서 큰언니는 어머니에게 오른 팔이 요. 우리 형제들에게는 또 하나의 정신적인 지주였다. 큰언니의 손에 이끌려 입학을 하고 졸업을 했으며, 나중에는 가세가 몰락하여 큰언니가 마련해 준 등록금으로 학교에 다니게 되었다. 그래서 아침마다 솜씨있게 내 머리를 땋아준 사람은 어 머니가 아닌 언니였고, 늘 내 옷을 새로운 모양으로 지어준 사람도 다른 누구 아닌 언니였었다.

어느 운동회 때 그것을 입고 뛰기에는 너무 불편할 정도로 치렁한 운동복을 언니가 만들어 주었는데, 그것은 운동복이라기보다 차라리 정식 원피스라 하는 편이 나을 그런 옷이었다. 옷감은 옥양목이었지만, 한쪽 허리께에다 빨간 갑사헝겊을 고를 지어 묶어 늘어뜨린 운동회 날의 모습은 마치 파티에라도 초대받아 간 요즘 소녀의 모습과 다름없어 보인다. 그 빨간 갑사리본 때문에 내가 달리기에서 넘어져 꼴찌를 했을 때도 우리 동네 사람? 湧?모두 그 날래지 못한 아이가 바로 나라는 것을 금방 알아 볼 수 있었다.

6.25 때 전쟁 때 피란 가서 공부하던 시골 고향의 국민학교. 잡음이 지글지글 끓던 확성기에서는 운동회 노래가 연달아 흘러나오고, 마당에는 그물처럼 쳐진 만 국기가 바람에 찢어질 듯이 팔락거렸다. 시골 운동회 날은 잔칫날과도 같았다. 빨 간 감과 찐 밤과 삶은 계란을 파는 장수들이 진을 치고 있었고, 먼지가 풀썩거리 는 마당에서 어른들은 자기 아이들을 불러 앉혀 집에서 장만해온 음식을 먹였다. 운동장은 달리기를 하는 사람 따로 있고 , 장사를 하는 사람 따로 있었으며, 한구석에서 음식을 먹는 일에만 정신을 파는 사람이 따로 있었다. 그러나 모두는 즐거 웠고 , 모처럼 일손을 쉰 동네 사람들은 매일같이 이렇게 즐거운 날만 있으면 얼마나 좋을까 하는 아쉬움 속에서 하루해가 짧기만 했었다.

운동회를 생각하면 하얀 헝겊 신발이 생각난다. 흰 운동화가 없어 시골 아이들은 맨발로 뛰고 맨발로 춤을 추었다. 그러나 나는 언니가 특별히 창안하여 만들어준 예쁘고 깜찍한 헝겊 신발을 신었다. 그 것은 발레를 할 때 신는 토슈즈와 비슷했는 데, 발등? 〈?빨간 색실로 장미꽃이 수놓아져 있었다. 지금도 그 가벼운 신바닥으로 차갑게 느껴지던 학교마당의 진흙이 생각난다. 그리고 그 냉기가 열이 난 몸을 식혀주던 상쾌한 기분을 나는 아직도 느낄 수가 있다.

그날 나는 언니가 그렇게 애를 써 주었음에도 어느 한 종목에서도 상을 타지 못 하였다. 아마 그만큼 운동에는 소질이 없었던 모양이다. 다만 하얗던 신발에 뻘건 진흙이 묻는 것이 안타까웠고, 들뜬 분위기에서 왠지 즐거움보다 외로움이 느껴지 던 이상한 감성의 아이였을 뿐이다.

요즘 아이들의 옷차림을 보면 하나같이 예쁘다. 우선 모양과 빛깔이 다양한데 놀라고 , 아이들의 옷을 입힌 어머니들의 미적 감각에 또 한번 놀라게 된다. 지금처럼 물자가 풍성하지 못했던 시절에 어린아이를 키운 어느 부인은 다시 한번 아이를 낳아 키워보고 싶다고 하였다. 편리한 종이 기저귀도 채워 보고, 예쁜 옷도 사 입혀주면서, 자기 아이를 다시 길러 보고 싶다고 하였다. 아마 여자라면, 어머니라면 그런 생각을 한번쯤 해 볼 수 있을 만큼 편리하고 예쁜 아기용품이 많아진 탓일 것이다.

그러나 내게는 언니가 만들어준 그 때 그 시절의 옷들이 나의 추억 속에서 여전 히 아름다운 채로 남아있다. 그것은 그 옷들이 돈을 주고 산 것이 아니라 언니의 마음으로 지어진 옷들이기 때문일 것이다.

현대는 아이들의 옷을 집에서 일일이 만들어 주지 않아도 될 만큼 시장이 풍성하다. 그리고 아이들 역시 엄마가 만들어준 서툰 솜씨의 옷보다 시장이나 백화점에서 사 입는 세련된 옷을 더 좋아할지도 모른다. 세상은 이렇듯 달라졌다. 그리고 이 변화는 누구도 막을 수가 없다.

그렇지만 이런 변화 속에서도 내겐 아직도 변하지 않는 것이 두 가지 있다. 하나는 우리 동생들을 사랑하는 언니의 마음이 여전히 한결같다는 것이고, 또 하나는 옥양목 적삼을 가는 허리에 받쳐입었던 그 여인이 아직도 하얀 진달래꽃처럼 그렇 게 깨끗하고 쓸쓸하게 살고 있다는 사실이다.

주위가 어두워지는 것도 모르고 나는 하얀 진달래꽃을 앞에 오랫동안 서있었다. 그리고 그 꽃이 나의 큰 언니를 닮았다는 생각을 하고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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