부끄러움
 
김 창 식
 
 
 나의 대학시절을 관통한 키워드는 부끄러움이었다가장 큰 조각 그림은 최루탄 연기 가득한 거리 풍경이다시도 때도 없이 그날의 학교 주변 거리가 마술처럼 큰 화면으로 펼쳐진다마음속에 비상등이 켜진다매캐한 냄새가 끼쳐오고 눈이 따가우며 기침이 난다함성과 발자국호각소리가 뒤섞여 들려온다.
 1960년대 후반학교는 독재정권에 저항하는 시위로 술렁였다버스에서 내려 교문으로 향하는데 수선스럽고 기이한 열기가 전해왔다가까이서 함성도 들렸다시위대가 교문 밖으로 뛰쳐나오고 있었던 것이다나는 '하는 사이 시위대에 휩쓸렸다역사와 사회에 대한 뚜렷한 인식이 없는 심약한 학생이었던 나는 시위의 낌새가 보이면 범법자처럼 웅크린 채 도서관으로 숨어들곤 했다.
 자신의 의지와는 달리 데모대에 섞인 청년은 대열 후미에 몸을 숨긴 채 건성으로 구호를 따라 외쳤다. "삼선개헌 결사반대!" 경찰들이 방석모를 쓴 채 열 지어 도열했다우두머리로 보이는 자가 회유하려 들었고 우리는 비웃었다몇 미터를 시적시적 나아갔을 때 소방서에 숨어있던 매복조가 후미를 들이쳤다동료들과 뒤엉켜 옆 상점으로 도망치는데 누가 등을 두드렸다뒤돌아보니 방독면을 쓰고 곤봉을 든 진압 경찰이 서 있었다그는 나와 비슷한 또래였다.
 청량리 경찰서 내 임시구치소 시멘트 바닥 방에 수용된 학생들은 30명 남짓이었다후텁지근한 열기와 지린내가 끼쳐왔다형식적인 조사를 받은 후 봉지 빵으로 끼니를 때운 우리는 삼삼오오 바닥에 눕거나 벽에 기댄 채 밤을 지새웠다시위에 참가했다가 그저 잡혀온 터에 무슨 대단한 무용담이 있을까만 어떤 친구들은 낮의 활약상에 대해 과장된 제스처를 써가며 자랑했다.
 “일송정 푸른 솔은늙어 늙어 갔어도~”(선구자) “긴 밤 지새우고풀잎마다 맺힌~”(아침이슬같은 가곡을 부르는 모둠도 있었지만 따라 부르는 학생은 많지 않았다생뚱맞게도 처량한 가요를 부르는 학생도 있었다. “캠퍼스 잔디 위엔또다시 황금물결~”(나이 갈수록나는 뚜렷한 신념이나 의지가 있을 리 없으니 벽에 기대어 눈을 감고 앉아 있을 뿐 그저 피곤하기만 했다.
 사람은 때 아닌 계기로 신분이 달라지기도 한다지만다음날 후줄근한 모습으로 학교에 오니 밤사이에 영웅이 돼 있었다. ‘어어’ 하다 그저 후달렸을 뿐인 나의 겉치레 행위가 용기 있는 자의 행동으로 인구에 회자됐다나에 대한 모든 상찬(賞讚)은 나에 대한 오해의 총화(總和)였다그것은 왜곡된 것이었으나 부인할 용기가 없었다그런다 해도 믿어주지도 않을 것이었다한편으론 그런 정황을 즐기고 있는 나 자신을 발견하고 부끄러웠다소리 내어 울고도 싶었다나는 시대를 잘못 태어난 천재나 의식이 있는 운동권 학생이 아니었다그저 사는 것이 마뜩치 않은 가난한 청년이었다.
 오래 전에 본 영화 <이오지마의 영웅>이 떠올랐다. 2차 세계대전 중 인디언 출신 소년병이 이오지마(琉黃島주둔 해병대에 지원해 고지 탈환작전에 투입된다치열한 전투 후 고지 정상에 성조기를 꽂을 때 동료들과 함께 찍은 기념사진이 소개돼 소년은 국민적 우상으로 탈바꿈한다나중 그곳에 도착한 소년 병사는 바람이 불어 깃발이 쓰러지려 해서 별 생각 없이 깃발을 붙잡아 준 것뿐이었다정체성에 혼란을 겪는 주인공이 고향에 돌아와 쓸쓸히 죽어가며 내 뻗는 손이 고지에서 깃발을 지탱하는 손과 오버랩된다.
 사회 진출 후에도 부끄러움을 극복한 것은 아니었다오히려 가중됐다회사를 다니며 학교 때 그토록 거부하고 저항했던 것들에 순응하고 그런 내 자신을 합리화 해왔음을 깨달았다믿고 의지해 왔던 순수개성참됨의로움자유의지 같은 근원적 가치들이 무너지고 효율과 요령위계질서합리성현실감각 같은 방편들이 더 높이 평가 돼 혼란스러웠다불씨로 잠복해 있던 부끄러움이 되살아났다처음에는 스파크처럼 튀는 불꽃으로 시작하더니 너울처럼 불길로 번졌다외부로부터의 요인과 내면의 부끄러움이 뒤엉킨 난장(亂場)에서 나는 고아 같았다.
 그렁저렁 지리멸렬한 나날을 보내다 부끄러움과 더 이상 불화해서는 안 된다는 생각을 했다그간 체득한 현실감각을 바탕으로 부끄러움의 감정에 연루된 자기혐오가 불러오게 될 위험성을 어렴풋이 감지한 셈이었다고나 할까자괴의 염()에 사로잡혀 헤어 나오지 못하면 매사에 소극적이고 자신이 초라해 질 뿐 발전이 없으니 이를 바람직한 방향으로 활용해야 하지 않을까부끄러움이 지금껏 나를 지탱하는 힘이었는지도 모르지만 이제는 돌파가 필요하다도끼를 들고서라도 나를 속박하는 끈을 끊어내야 한다.
 큰 위인으로 우러르는 아우구스티누스톨스토이루소 같은 선인들이 참회에 대한 저작을 남겼다는 사실에도 생각이 미쳤다그들도 젊은 시절 나약한 내면을 지녔고 방황했으며 보통사람보다 더 큰 부끄러움을 느꼈지만 이를 극복하려는 의지와 노력에 힘입어 인류의 스승이 된 것이 아니었던가그렇다 해도 삶의 버거운 짐을 지고 어떻게든 견디어내야 하는 보통사람에게 위인들의 삶을 모범으로 삼아 익숙한 생활방식을 갑자기 바꾸라고 요구하는 것은 무리가 따를 법하다.
 나를 포함 평범한 생활인인 우리가 위인들의 삶에 다가서는 현실적이고 구체적인 방법이 무엇일까무슨 일을 하든지 지금 하는 일을 온 힘을 다해 열심히 하는 것이 중요하다그 일이 아무리 사소한 일일지라도그렇게 해서 삶의 방식과 태도를 조금씩 개선해나가면 도움이 되지 않을까 한다또 하고 싶은 일에 앞서 해야 할 일을 하는 것도 바람직하리라그래야 떳떳하고 마음이 편하니까그밖에?
 쉽지 않으리라 여기지만 때로 자신에게 이익으로 돌아오지 않으리라는 것을 알면서도 애써 그리로 나아가기나보다 어려운 처지에 놓인 사람을 찾아보는 일아무리 내가 힘들지라도 주위를 살펴보면 항상 나보다 더 힘든 사람이 있기 마련이니까그에 더해 작은 봉사와 나눔의 실천바라건대 나의 바람이 우선 나에게 만이라도 헛된 소망이거나 도로(徒勞)에 그치는 것이 아니기를.
 
 *<<수필미학 >> 2020 봄호
profile