기자가 몰입한 만큼 독자는 공감한다 / 기자 안수찬

 

글을 지탱하는 자아  

   글은 자아의 노출이다. 그것도 불특정 다수 앞에 발가벗겨지는 일이다. 그래서 사람들은 글쓰기가 두렵다. 글에 담긴 자신을 누군가 폄훼할까 두렵다 어떤 글도 독자를 한정하거나 특정할 수 없다. 누가 읽을지 알 수 없고 의도할 수도 없으므로 글쓰기는 때로 위험천만한 모험이 된다. 불특정 독자가 나를 간단히 오해할 것이다. 두려운 나머지 사람들은 가장 은밀한 일기를 쓸 때조차 미래의 독자를 의식한다. 글은 어떤 경우에도 개인적이지 않다.

 

   동시에 사람들은 글쓰기를 갈망한다. 그것은 불멸에 대한 동경이다. 삶은 찰나의 시공간에 붙잡혀 있지만 글은 그 올가미를 벗어버릴 수 있다. 글은 소통의 경계를 붕괴시킨다. 나를 모르는 사람에게 내가 죽고 난 다음까지 나를 알릴 것이다. 글은 기본적으로 내가 주도하는 미디어다. 글 쓰는 이가 글 읽는 이를 지배한다. 글을 잘 쓴다는 것은 자아를 거리낌 없이 펼쳐 보일 광대한 영지를 갖는 일이다. 이 영토 안에서 나는 자유롭고, 그 땅에서 나는 세계의 주인공이다. 글에 비하자면 말은 덧없다. 기껏해야 가족, 연인, 동료에게 나를 표현할 뿐이다. 매스미디어를 장악한 웅변가가 아니라면, 뭇 사람의 말은 공중에 흩어져 자취조차 남지 않는다. (실은 웅변조차 글로 옮겨야 역사가 된다.) 글은 불멸의 미디어이므로, 사람들은 찰나의 삶을 글에 담으려 안달한다.

 

   서로 충돌하는 공포와 열망을 잘 조절하면 좋은 글을 쓸 수 있다. 글쓰기는 자아 노출의 공포와 열망 사이에서 줄타기하는 일이다. 글을 지탱하는 것은 그래서 문장이 아니다. 그 속에 담긴 자아가 글의 정수다. 글은 의 문제다. 김구의 백범일지, 함석현의 씨알에게 보내는 편지등이 훌륭한 것은 그 문장과 별 상관이 없다 그들은 문장 연습을 거듭한 문필가도 아니다. 그들의 자아가 훌륭하므로, 자아를 그대로 드러낸 그들의 글도 훌륭하다.

 

   여기에 이르러 좋은 글을 쓰는 방법이 분명해진다. 글에 담기는 자아를 훌륭하게 갈고 닦으면 된다. 우선 10년쯤 면벽참선하며 수양하자. 그 다음 10년쯤 수만 권의 장서를 독파해 교양을 쌓자. 나머지 10년쯤 여러 직업을 거치며 연륜을 얻자. 그렇게 30년을 고행한다면 어지간한 자아에서도 향기가 날 것이며, 그 향기가 밴 글도 읽어볼 만할 것이다. 물론 이 방법의 치명적 약점이 있다. 시간이 너무 많이 걸린다. 언제쯤 고행이 끝날지 정확히 기약하기도 어렵다.

 

글쓰기는 자아와 타자가 섞이고 스미는 일  

   인내가 부족한 이들을 위한 지름길이 있다. 게다가 그 길의 초입을 대부분 겪어봤다. 자아 대신 타자에 주목하는 방식이다. 자아와 대면하는 일은 누구에게나 쉽지 않다. 반면 타자를 살피는 일은 당장 시작할 수 있다. 자아를 노출하는 일에 비해 두려움과 창피함이 덜하다. ‘의 문제를 응시하면 어마어마한 고행을 건너뛰어 글쓰기를 시작할 수 있다.

 

   ‘의 문제가 제 삶에 왈칵 달려드는 때를 사람들은 간간이 겪는다. 누군가를 간절히 사랑할 때, 어쩔 수 없이 떠나보낼 때, 누군가 자신을 해코지할 때, 한없이 증오할 때, 사람들은 가슴이 저리거나 치가 떨리거나 심장이 북받친다. 바로 그때, 사람들은 사무치게 글이 쓰고 싶어진다. 살면서 누구나 한두 번쯤 겪는 그런 밤이면 명치에서 토악질처럼 글이 솟구쳐 오른다.

 

   뭇 사람들은 이런 일을 평생 몇 번만 겪는다. 글을 잘 쓰는 사람은 이런 일을 거의 매일 겪는다. 그들은 세상의 모든 것과 사랑하고 실연하며 투쟁하고 갈등한다. 타자로 인해 자아가 매일 뒤흔들린다. 그들은 매일 토악질하며 글을 쓴다. 이 대목에 이르러 글은 자아를 넘어서는 타자의 문제다. 글쓰기는 타자에 대한 감응의 표현이다. 좋은 글을 쓰려면 삼라만상을 향한 감성의 더듬이를 벼려야 한다. 주변의 이웃, 그들을 엮는 관계에 민감하게 감응해야 글을 쓸 수 있다.

 

   세상 모든 길은 서로 만난다. 자아를 성찰하는 길과 타자에 감응하는 길은 어느 경지에 이르러 서로 섞이고 스민다. 둘의 팽팽하고도 적절한 긴장 가운데서 글이 탄생한다. 공교롭게도 저널리즘은 정확히 그런 글을 지향한다. 문학의 글(소설), 과학의 글(논문), 일상의 글(일기) 등과 비교된다. 모든 글은 자아와 타자가 교감한 결과지만 소설, 논문, 일기 등에서 자아는 종종 타자를 압도한다. 저널리즘의 글, 즉 기사에서는 균형추가 반대로 기운다.

~중략

 

끊어치면서 리듬을 탄다

   지금 하얀 모니터에 검은 커서가 깜빡인다. 뭘 써야 할지 막막하다. 빚쟁이처럼 아우성치는 커서를 오른쪽 끝으로, 저 아래로 밀어붙여야 글이 된다. 그 압박은 누군가를 밤새게 만들고 누군가를 술 마시게 한다. 그래도 돌아앉으면 또 커서의 압박이다. 지금 이 글을 쓰는 순간도 마찬가지다. 이럴 때, 나는 중얼거린다. “끊어 치자.” 이 하나로 글쓰기의 거의 모든 것을 해결할 수 있다.

 

   끊어 치기는 글쓰기의 배터리다. 끊어 쳐야 글의 시동이 걸린다. 문장을 끊어 치는 것은 글쓰기의 출발이다. ‘주어-목적어-서술어의 기분 단위로 하나의 문장을 끝내야 한다. 수학의 소인수분해처럼 더 이상 줄일 수 없을 때까지 모든 문장을 단문으로 줄이는 것이다. 짧고 간결한 문장을 쓰자는 이야기인데, 그렇게만 알고 있어선 짧은 문장을 쓸 수 없다. 모든 문장은 구질구질해지기 마련이다. 그러니 기어코 애를 써서 끊어 쳐내는호흡으로 써야 한다.

 

   끊어 치기는 만병통치약이다. 감동적인 연애편지를 쓰고 싶은가. 끊어 쳐라. 괜찮은 소설을 쓰고 싶은가. 끊어 쳐라. 사람들의 뇌리에 기억될 기사를 쓰고 싶은가. 당연히 끊어 쳐라. 처음부터 제가 쓴 글을 끊어 치는 건 쉽지 않다. 제 글을 끊어 치면, 오장육부를 잘라내는 듯 고통스럽다. 이럴 때 남이 쓴 글을 끊어 치면 도움이 된다. 싹둑싹둑 썰고 끊어 후려칠 수 있다. 문맥에 신경 쓰지 말고 기계적으로 끊어 쳐도 된다. 단 한 번이라도 끊어 치고 나면, 내용과 상관없이 모든 글이 그럴듯해 보이는 놀라운 경험을 할 수 있다.

 

   이쯤에서 반박하고 싶을 것이다. 세상에는 유장하고 화려한 문장으로 좋은 글을 쓰는 사람들이 있다. 왜 그들의 길을 따르면 안되는가? 답은 간단하다. 그들은 훌륭한 자아를 갖춘 사람들이다. 그들은 뭘 어떻게 써도 좋은 향기를 담아낼 수 있는 사람들이다. 고매한 자아를 갖추지 못했다는 사실을 스스로 인정한다면, 무조건 끊어 쳐라. 간단하고 빠르게 글을 쓰는 방법이다.

 

   문장을 끊어 치지 않으면, 손가락이 글을 지배한다. 커서의 압박에 시달리다보면, 손이 가는 대로 그  를 쓰는 일이 생긴다. 손가락이 글을 지배하면 문장이 길어진다. 일단 길어진 문장은 제 관성으로 더 장황한 글을 만든다. 장황한 글에서 생각과 느낌은 흩어지고 희미해진다. 결국 나의 글은 내 뜻과 상관없이 산으로 가버린다.

 

   문장을 끊어 치면, 손가락 대신 생각과 마음이 글을 끌고 간다. 끊어 치면, 자아의 느낌과 생각에 더 집중할 수 있다. 애초 느끼고 뜻했던 바대로 문장을 배치하고 글을 이어갈 수 있다. 끊어 치면, 독자는 필자의 세계에 보다 쉽게 몰입한다. 긴 문장은 독자의 시선과 호흡을 방해한다. 긴 문장을 따라가다 중도에 읽기를 포기한다. 유장하지만 익히지 않는 글과 담백하여 잘 읽히는 글 가운데 어느 것이 훌륭한 글이겠는가.

 

   문장을 끊어 치면, 리듬을 발견할 수 있다. 글을 잘 쓰는 사람들은 고유의 리듬을 갖고 있다. 글만 읽어봐도 필자가 누군지 알아차리는 일이 그래서 가능하다. 세상 모든 이에겐 문장의 리듬이 내장되어 있다. 글을 잘 쓰는 사람은 그런 리듬을 자유자재로 끄집어낸다. 끊어 치기는 내장된 리듬을 발견하여 끄집어내는 방법이기도 하다. 글의 리듬에 있어 정해진 악보는 없다. 오직 각자의 리듬만 있다. 내가 즐기는 리듬은 짧게-짧게-조금 길게-아주 길게-다시 짧게의 방식이다.

 

   주의할 것이 있다. 끊어 치는 연습을 하지 않으면 리듬을 담을 수 없다. 리듬을 욕심내기 전에 끊어 치기부터 해야 한다. 초보자는 처음부터 끝까지 기계적으로끊어 쳐야 한다. 그 다음 짧은 문장 몇몇을 이어붙이면 리듬이 생겨난다. 이를 반복하면 자신만의 리듬을 찾을 수 있다. 글이 풀리지 않으면, 어찌 시작할지 막막하면, 어떻게 끝낼지 알 수 없다면, 일단 끊어 쳐라. 그러면서 리듬을 타라.

~이하 하략.

 

_출처 나는 어떻게 쓰는가, 씨네 북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