밧줄에 의지한 물놀이
바닷가 가까이 살고 있기에 마음만 먹으면 언제든지 달려갈 수가 있다. 그래서인지 결혼 초에는 정든 가족들이 그리워 일을 마치고 돌아온 남편을 졸라 저녁 대신 햄버거와 음료수 하나씩을 들고 근처 라구나 비치로 자주 나갔었다.
그곳 제일 높은 절벽에 올라 철썩이는 파도에, 태평양 건너 정을 듬뿍 남겨 두고 온 그곳으로 그리운 마음을 실려 보내곤 했다. 나의 눈빛만큼이나 붉게 노을을 물들이며 가라앉는 해에 그 길로 달려가 아침을 맞는 가족들에게 안부를 전해달라고 마음속으로 떼를 써 보기도 했다. 타향도 정이 들면 고향이라고 자식 낳고 정 붙이며 살다 보니 내 자리가 바로 이곳이다 싶지만, 아직도 바닷가에 서면 수평선 저 너머일 것 같은 착각에 달려가고 싶어진다.
한국은 이곳에 비해 좁은 땅이지만 바다를 보러 간다는 것이 그리 수월치가 않다. 그래서 여름이 되면 바캉스라는 특명하에 꼭 치러야 하는 연중행사인 양, 그 준비에 너도나도 들뜨곤 했다. 오가는 여정에서, 그곳의 바가지 상술에서, 밀리고 부딪치는 인파의 물결 속에 시달려, 몸과 마음에서 떠날 때의 기대감과 흥분을 빼앗아 버리기 일쑤였다.
다녀와서는 두 다리 쭉 뻗고 선풍기 앞에 앉아 수박 한 통 쪼개 놓고 휴가길이 아닌, 내 돈 쓰며 한 고생길이었음을 상기하며 다시는 가지 않겠다는 다짐하게 된다. 그 다음 해에도 ‘자의 반 타의 반’으로 또 움직이게 될 것이면서도….
여름이면 미리 가족들이 대강의 날짜를 정해 휴가를 맞추어, 될 수 있으면 온 가족이 가려고 노력했다. 언니들이 결혼한 후에도 이 전통은 이어져 아버지의 표현대로 ‘일개 대대’가 움직였기에 거기에서 발생한 여러 재미있는 사건들이 많았다.
기억에 남는 것은 힘들었던 때이다. 그중에 내가 초등학교 1~2학년 때로 60년대 말이었다. 바닷가는 못 가고 근처 강가에 가기로 했다. 자가용이 드물던 때라 대식구가 움직이는 일은 쉽지가 않았다. 더구나 일주일 예정이니 의식주를 해결하려면 한 살림 떼어가야 하는 형편이 되고 보니 버스를 이용하기도 힘들었다.
다행히 집에 트럭이 있었는데 짐칸에는 법적으로 사람이 탈 수 없었다. 아버지와 오빠는 짐칸 양쪽에 큰 판자를 덧댄 후 튼튼한 밧줄로 여러 번 꽁꽁 묶고 위와 뒤쪽으로는 천막을 늘어뜨렸다.
떠나는 날 어른들은 점잖게 운전석 쪽에 앉으시고, 올망졸망 칠 남매는 짐칸 맨 안쪽에 구겨져 실렸다. 한 살림 차릴 도구들로 입구를 막아버리니 누가 보아도 완벽한 이삿짐 차였다. 그러나 실은 피난민 차였다. 더위를 피해 도망가는….
대로를 달릴 때는 그런대로 좋았지만 강가를 따라 위로 올라갈수록 길이 나빠 덜커덩거리더니 나중에는 사람과 짐이 뒤죽박죽 섞여 버렸다. 좁은 차 안에서 이리저리 부딪치는 재미에다 몰래한다는 우리만의 비밀스러움에 그것 자체도 즐거웠다.
그러나 워낙 몸이 약하던 나는 울퉁불퉁한 길에 엉덩방아를 찧으며 흔들리다 보니 차멀미가 나서 참다못해 토악질하고 말았다. 여름 한낮의 뜨거운 햇볕 아래에서, 그것도 겨우 숨구멍만 낸 막힌 곳에서 풍기는 고약한 냄새는 모두를 괴롭혔기에 여럿의 손으로 준 알밤세례도 아팠지만 그 후 두고두고 놀림거리가 되었다.
목적지에 도착해서 어른들은 텐트를 치고 석유 풍로와 버너를 걸어 음식을 하느라 분주했고, 우리는 첨벙첨벙 시원한 물에 뛰어들어 노느라 오는 동안의 고생은 강물 따라 흘려보냈다.
새로 산 고무 튜브를 몸에 걸친 채 방안을 헤매다가 물 속에 둥둥 떠다니니 겁이 났다. 얕은 곳에서만 놀아 바닥의 돌멩이에 무릎을 찧어도 마냥 즐겁기만 했다. 물속을 휘젓고 노는 것이 피곤한지 한참을 놀다 허기진 배로 뛰어나오면, 수건을 둘러주며 엄마가 내미는 과일, 찐 옥수수, 닭죽 등을 덜덜 턱을 떨며 먹는 것도 꿀맛이었다.
잠자리에선 언니에게 별자리 이야기를 들었다. 풀 뜯어 피워 놓은 모깃불에서 나오는 연기에 재채기했지만, 물소리를 자장가 삼아 스르르 잠들곤 했다. 특별히 시골에 연고가 없는 서울내기라 강 건너 바라다 보이는 시골집의 풍경은 그림 그대로였다. 얕은 강가를 가로질러 엄마의 손을 잡고 연기 모락모락 피어오르는 시골집에 가서 텃밭에 심어진 갖은 채소를 사 오던 재미는 새로운 세계를 보는 느낌이었다. 날 채소를 싫어하던 나는 그때부터 싱싱하고 쌉싸름한 그 맛을 즐기게 되었다.
그러나 이렇게 별천지 같던 물놀이도 삼 일쯤 지나, 하늘에 검은 구름이 잔뜩 깔리며 한두 방울 빗방울이 떨어지는 것으로 깨져 버렸다. 소나기겠거니 하고 모두 텐트로 들어가 이것 또한 색다른 재미라고 낄낄대는데, 어느새 빗방울은 점점 굵어지고 텐트가 비바람에 심하게 흔들렸다.
아버지는 볼일이 있어 시내로 가셨기에 우린 모두 무서움에 떨었다, 마침 근처에 남자 대학생 셋이 텐트를 치고 있었는데, 자주 끼니를 챙겨주며 안면을 튼 사이라 엄마에게 이러고 있을 게 아니라 짐을 정리하자고 했다. 쏟아지는 비를 맞으며 모든 짐을 좀 더 높은 곳으로 옮겨놓아야 했다. 우리가 놀던 모래사장도 차오른 물살에 자취를 감추고, 자장가를 들려주던 물소리는 포효하는 동물의 울음같이 우렁차고 무서웠다.
비 맞은 생쥐가 되어 발만 동동 구르고 있는데 강 건너에 아버지의 차가 보였다. 비가 오자 걱정이 되어 일을 제쳐두고 달려오신 거였다. 어른 무릎께를 오르내리던 물은 어느새 아버지의 가슴까지 왔다. 정말 눈 깜짝할 새였던 것 같은데….
아버지는 길가에 있는 큰 느티나무에 밧줄을 묶고 건너오셨다. 반가워 손을 흔들며 소리 지르는 우리를 건너다보며 온 힘을 다해서 세어진 물살과 싸우셨으리라. 그리곤 이쪽 나무에 나머지 줄을 연결하셨다. 말할 새도 없이 대학생들과 아버지는 아이들을 하나씩 등에 업고 한 손은 줄을 잡으면서 강을 가로질러 건너왔다. 평소 과묵하고 엄하셔서 아버지 앞에만 가면 어려웠는데 떨어질세라 목을 꼭 끌어안으니 아버지의 등이 엄마의 것보다 넓고 따뜻함을 느꼈다.
그해의 바캉스는 밧줄에 의지해 그렇게 마감되었다.
가끔 TV에서 어느 지역에 홍수가 났다고 하며 밧줄로 연결해 구조하는 장면을 보면, 그때의 일이 생각나 돌아가신 아버지가 보고 싶다.
사람은 추억을 먹고 산다. 살아오면서 가족과 겪은 많은 기억이 같은 공감대를 형성하며 끊임없는 사랑과 그리움으로 남아 가족의 중요성과 일체감을 느끼게 해준다. 지금 이 순간도 나중에 돌아보면 아름다운 추억거리가 되도록 충실히 살아야 할 텐데 하는 걱정이 앞선다.
참으로 정겨운 작품입니다.
어린 시절의 아련한 옛 추억을 떠올리게 만드네요.
부모 형제와 함께한 여행길.
좋았든 힘들었든 두고두고 생각나는 LP 음반입니다.
아! 누가 말했던가.
지나간 것은 아름답다고.