얼마 전 바늘로 인해 고맙다는 인사를 받았다. 한국에서 친척이 다니러 왔는데, 손님 접대도 문제지만 우리네 정리로 돌아갈 때 빈손으로 보낼 수 없었다. 고민 끝에 실생활에 꼭 필요하리라는 평소의 믿음대로 크고 작은 50개의 바늘이 들은 바늘쌈을 준비했다. 그러면서도 혹 실수한 것은 아닐까 걱정했는데, 며칠 후 서울에서 온 전화는 나를 기쁘게 했다.
요즘 옷을 꿰매 입는 일이 드물어 어쩌다 바늘을 급히 쓰려고 하면 찾을 수가 없었단다. 그때마다 사야지 하다가도 돌아서면 잊어버렸는데 잘 쓰겠다며 모두 반가워하더란다.
스스로 여자임을 자각하던 여중 때부터일 것이다. 그때부터 지금까지 조그만 바느질 통을 부적처럼 가방 한구석에 지니고 다녔다. 그것은 아마 어릴 적 나에게 요술 상자로 보이던 엄마의 반짇고리에 대한 아련한 잔상들이, 거부할 수 없는 운명의 길로 끌어들인 무의식적인 행동일지도 모른다.
살림을 도와주는 사람이 있어도 항상 바삐 움직이셨던 엄마는 바느질하실 때만은 동선이 적었기에 곁에 맴돌며 가까이 있을 수 있어 좋았다. 그럴 때마다 옆에 놓이는 반짇고리를 뒤지고 노는 재미도 한몫했다.
엄마의 반짇고리는 대나무껍질로 만들어 색색의 물을 들인 채상이라 불리는 것으로 직사각형이었다. 예로부터 부덕, 부용, 부언, 부공 등으로 여자들이 갖추어야 할 덕목 중의 하나인 바느질은, 자급자족에 의지하던 사회에서 여자들에게는 벗어날 수 없는 굴레였다. 온 가족의 입성을 손수 해결해야 했기에 바느질 도구는 귀중한 실용품이자 수족과 같았다. 바느질과 길쌈을 잘하면 시어머니께 사랑을 받는다고 하여 솜씨도 문제지만 그 도구도 혼수 중에서 신경 쓰이는 부분이기도 했단다.
그 채상모를 열면 색색의 실이 엉키지 않도록 장방형이나 대각선의 실패에 감겨 있었다. 실 꼬리를 단 바늘은 녹스는 것을 방지하기 위해, 솜이나 머리카락을 속에 넣어 둔 바늘꽂이에 고슴도치 모양 꽂혀 있었다. ‘답’이라고 불리는 골무는 반타원형으로 바느질할 때 손가락에 끼워 바늘을 누르거나, 찔리는 것을 막아주는 데 쓰였다.
그 외에 가위, 자, 크고 작은 자투리 천들, 각양각색의 단추들과 백열전구 알 등이 엄마의 손길을 기다리며 옹기종기 모여 있었다. 그중 퓨즈가 나간 전구는 극성맞은 우리들의 양말 뒤꿈치에 구멍이 나면, 같은 색의 천을 안에 대고 쑥 밀어 넣어 동그랗게 만든 후, 감침질하는데 요긴하게 쓰였다.
이 모든 도구는 엄마가 여인네로서 겪어야 했던 삶의 응어리진 한과 손때에 절어 반들반들 윤이 나고 있었다. 그러나 아직 여물지 않은 나에게는 숙명이라는 연보다는 재미있는 소꿉놀이로 온갖 궁금증을 불러일으키는 장난감들이었다.
바느질은 주로 하루의 일과를 마치고 밤에 하시곤 했는데, 좀처럼 한가한 시간을 갖기 힘드셨지만, 그 시간만큼은 유일하게 혼자만의 세계로 들어가실 수 있었다. 그날 있었던 일들을 곱씹고 되새기는 시간으로 어떨 때는 바늘 한 땀에 한숨 한번 새어 나오기도 하고, 등 뒤로 긴 그림자를 드리우며 멍하니 천장을 올려다보시기도 했었다. 얼굴 가득 환한 미소에 손길이 나는 듯이 가벼울 때도 있었고, 멀쩡한 반짇고리를 통째로 확 뒤집어 놓고 하나하나 다시 정리하실 때는 그 대상이 반짇고리가 아니라 엄마의 마음을 다잡으시는 것이었으리라 짐작된다.
바늘이 지나온 길을 다시 가지 못하고 매듭지어 실을 끊어내듯이 하루를 체념으로 마감하며, 가슴속에 삭이는 여인네의 한을 바느질에 말없이 담아내셨다. 온갖 상념 속에서도 가족들의 의복을 매만지실 때는 입힐 사람을 생각하며, 한 땀 한 땀 사랑의 염원을 엮어내셨다. 물자가 귀한 시절에 알뜰살뜰 몇 번씩 재활용하는 지혜를 발휘하셨다. 그렇기에 바느질에 소용되는 도구는 정성스럽고 귀중하게 간직되며, 자잘한 것에도 따뜻한 숨결과 진한 애정이 깃들여 있었다.
외할머니가 그러셨듯이 엄마도 내가 시집올 때 반짇고리를 준비해 주셨다. 엄마의 시대보다는 모양과 색이 다양하고 화려해졌다. 엄마는 마치 그것이 내 행복을 가름이라도 하는 것처럼 고민 끝에 마음에 드는 것으로 골라 주셨다. 자신보다는 나은 삶을 딸은 살아주기를 바라는 간절한 심정이셨으리라.
지금도 그 반짇고리는 화장대 한쪽에 자리 잡고, 대물림한 여인의 위치를 지키며 살아가는 나를 바라보고 있다. 그것을 받을 때 엄마와는 다른 삶을 살겠노라 다짐했었다.
자라오면서 보아온 여자의 삶은 그 자체가 헌신과 희생이었기에 전철을 밟고 싶지 않았다. 목소리 한번 크게 내지 못하고, 생색도 나지 않는 친척들 뒷바라지에 심신이 지치셨다. 주위에는 챙기고 살펴야 하는 일들뿐이었다.
자신의 자아는 두레박에 실어 우물 깊은 곳에 담가 두고, 본인의 인생은 가정의 평화를 위해 다락 구석에 저당 잡아 놓으셨던 것 같았다. 가슴속에 응어리진 한을 끌어안고 묵묵히 가정의 울타리 안에 갇혀서 그곳이 온 세상인 양 살아 내셨다.
그런 엄마를 답답해하며, 나는 여인네의 위치를 적당히 지키면서 살고자 했었다. 한쪽 옆구리에는 나만의 삶을 따로 꿰차고 당당하게 한 인격체로서 우뚝 서서 살아야겠다는 야무진 꿈을 가졌었다. 화려한 반짇고리에 걸맞게.
내 반짇고리에도 손때가 끼듯, 살아가면서 그럴 수밖에 없었던 엄마가 이해가 되고 누가 떠미는 것도 아닌데 나 자신도 그 길을 따라 살아가고 있다. 그나마 위안이 되는 것은 형태가 시대에 맞게 조금은 바뀐 것이리라.
<사랑으로 채우는 항아리 중에서>