아버지와 담배

 

 

토요일 오전의 로즈 힐 공원묘지는 한가롭다. 큰 언니와 올케언니는 9월의 따가운 햇볕을 피해 손바닥만큼의 그늘을 만든 빈약한 나무 밑에 돗자리를 폈다. 어머니는 이 짧은 외출이 힘이든지 돗자리에 앉아 숨을 고르고 있다. 작은 오빠와 Joe는 비석 주위의 잔디를 다듬고, 두 아들Andy 와 Kenny눈 물통에 물을 담아다가 할아버지 세수 씻겨 드린다며 비석을 닦고 꽃병에 물을 채웠다.

단장을 끝내자 오빠는 담배 한 개비에 불을 붙여 아버지 비석 앞에 내려놓는다. 어머니는 솔솔 피어오르는 연기를 보며 ‘참, 맛나게도 피우네. 어떻게 참았을 고. 구박하지 말고 실컷 피우게 놔둘걸 그랬어. 어차피 죽으면 끝인데.’ 아버지는 입에서 담배를 떼어 놓지 않을 정도로 애연가다. 두 번째 풍으로 쓰러지신 이후 건강을 염려하는 어머니와 항상 담배 때문에 다투셨는데 후회되시나 보다.

어릴 적 상봉동 삼거리에 살았다. 60년대 중반이니 자동차가 많지 않았다. 망우리 공동묘지로 성묘를 가는 대부분의 사람이 시내버스 종점인 중랑교 다리에서부터 걸어 망우리 고개를 올라갔다. 오곡 백화 풍성한 추석은 온 가족이 소풍을 겸할 수 있는 청명한 날씨이기에 차도까지 사람의 발길이 밀려나와 뽀얀 흙먼지를 일으켰다. 성묘 음식을 담은 보따리를 머리에 이고 간다. 돗자리를 옆구리에 끼고, 어떤 이는 지게에 한 짐 가득 얹었다. 아이들의 손을 잡은 어른들은 보름달처럼 웃음을 한가득 머금었다.

멀리 올려다본 망우리 고개 길은 검은색의 풍선이 둥실둥실 떠다니는 듯 했다. 산을 아울러 울긋불긋 사람 꽃이 피어 장관이었다. 송편을 한입 가득 물고 옆집 친구들과 마당에서 소꿉놀이하다 보면 열린 대문 사이로 사람들의 말소리가 들린다.

앞사람들에 밀려 천천히 걷다가 우리 집 문패를 본 사람들이 웅성거린다. 누군가 문패의 한자를 꼭꼭 집으며 말했다. 여기 좀 봐! 이·정·재(李·正·載) 맞잖아. 어머, 깡패 이정재가 여기 살고 있네. 아니 죽은 지가 언제인데. 사형이라지만 누가 아는가! 정치판의 이야기를 진짜로 믿나? 그래도 그 사람 똑똑했었는데. 잘 난 사람이긴 하지. 세월을 잘못 타고나서 그렇지 아까운 사람이야. 어딘가에 숨어 산다더니 여기였나 보네. 호기심이 많은 이들은 집 안을 기웃거리기도 했고, 여기 깡패 이정재가 사느냐고 작은 소리로 묻기도 했다.

초등학교도 입학하기 전이니 깡패가 무언지 몰랐다. 가끔 동네에 행사나 잔치가 있을 때면 단상 위에 여러 어른과 나란히 앉는 아버지의 모습이 떠올라 낭랑한 목소리고 ‘네.’라고 대답했다. 나는 애기, 이발소 집 명순이는 엄마, 철물점 집 기상이는 깡패 아버지가 되어 소꿉놀이에 해가 지는지도 모르게 놀았다.

자유당 시절의 유명한 정치깡패가 경기도 이천의 고향 사람으로 아버지와 동명이인이다. 불릴 때마다 이름 안에 담긴 정기가 흘러 인생에 영향을 미치는가. 아버지도 정치에 뜻이 있어 (정확하지 않지만 아마도 지금의 군수를 뽑는) 시의원 선거에 출마했다. 당선되었는데 5·16 쿠데타로 모든 선거가 무효로 되는 바람에 빚만 잔뜩 끌어안으셨던 아픔을 갖고 계시다. 집에서는 과묵하셔서 드러내 놓고 사랑을 표현하지 않았지만, 자식이 아프면 한밤중에도 속바지 차림에 맨발로 업고 뛰셨다. 올망졸망 7남매 기 살린다고 막내인 내가 초등학교 졸업할 때까지 육성회장을 장기 집권하셨다. 밖에서는 호인이라 주위에 사람이 많았고, 거절을 못하는 여린 마음 때문에 빚보증을 잘 서 집안에 빨간 딱지가 여러 번 붙었었다.

이제는 이정재(李正載)가 아닌 Jung Jae Lee 라고 새겨진 아버지의 비석을 손으로 쓰다듬는다. 고향에 선산을 두고 낯선 흙 속에 계시니 등이 시리지 않으실까. 이제는 깡패로 오해를 받을 일은 없겠지. 그래도 아버지의 그늘에서 철부지 막내로 응석을 부리던 때가 그립다. 이국에 살다 보니 점점 잊혀 가는 추석이지만 기억 속에 곱게 물든 추억은 오래오래 간직될 것이다.

비석 앞 담배꽁초에서 아버지의 냄새가 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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