저와 함께 걸으실래요?

 

 

작년 가을부터 어머니는 심한 우울증을 앓으신다. 감정의 기복이 심하고 식사량이 급격히 줄었다. 보건 양로센터에 일주일에 두 번 나가는 것을 제외하고는 만사가 귀찮아한다. 마냥 침대에 누워 창밖의 교회 십자가 탑을 넋 놓고 바라보는 게 일과다.

매번 똑같은 대화를 마치 녹음기의 재생 버튼을 누르듯 주고받는다. 어머니는 아버지가 이번에는 왜 기도를 안 들어 주시는지 모르겠단다. 기도 제목이 뭐냐고 물으면 하루하루 살아내는 일이 고통스러우니 늙은 몸뚱이 빨리 데려가시라는 독촉이란다. 잠들었다가 깨지 말고 그냥 그분 곁으로 올라가는 게 소원이기도 하다. 자신의 발로 걸어서 교회에 못 가겠다고 하면 양로원에 넣으란다. 어디서 구했는지 한인 타운 안에 있는 양로원 주소가 적힌 종이를 벽에 붙여 놓았다. 자식들 속상하게 왜 자꾸 그러냐며 눙쳐버리면 그게 모두를 위한 현명한 길이라고 잘라 말씀하신다.

 

어느 날 스르르 무너지듯 다리의 힘이 풀려 어머니는 주저앉았다. 응급실로 실려 가신 뒤 제대로 일어나 앉지도 걷지도 못한 채 두 달 만에 재활 양로 병원으로 자리를 옮겼다. 말이 재활이지 기실 양로원이다. 두 번 크게 넘어져 척추를 다칠 때 신경 줄이 많이 손상되었기 때문이기도 하지만 아마도 살아내는 일이 지치신 듯하다.

2인 양로병실에 몸 자리를 잡았다. 이미 병원차로 옮겨진 후 헐레벌떡 들어서는 자식들에게 ‘환영한다, 집들이에 와 준 것을. 이 정도면 콘도지.’ 웃는 얼굴로 맞아 주었지만 눈을 마주칠 수 없었다. 죄책감이 들어서다. 선뜻 집으로 모시고 가겠다고 나서지 못한 자신이 너무 부끄러웠다. 시아버지는 3년 가까이 집에서 돌보았는데 왜 엄마는 안 되는가. 남자와 여자의 차이가 뭐기에 한쪽은 당연하고 다른 쪽은 접어야 하나. 혼자였다면 상황이 달라질 수 있지 않았을까. 재혼한 것이 처음으로 후회되었다.

“걷는 연습 많이 하시고 기력을 얼른 찾아서 한 달 안에 집으로 돌아가셔야죠.”

낯선 환경인데도 적응을 잘하는 듯 보였다. 지나치는 간호사나 다른 직원들에게 환한 얼굴로 인사를 하고 지시사항을 잘 따라 ‘스윗 마마’라는 별명을 얻고 인기도 높다. 평상시 남을 먼저 배려하는 분이지만 지나치다 싶을 정도다. 과장된 몸짓에 더 걱정하던 일주일이 지난 어느 날이다. 물리치료실에서 웃는 얼굴로 운동을 잘 마치고 나서 침대에 누운 어머니가 갑자기 몸을 뒤틀며 고래고래 소리를 질렀다.

“힘들어. 힘들어서 못 살겠다. 나 좀 그냥 놔둬.”

재활운동이 버거웠나 보다. 괜찮은 척하기 지치셨나보다. 우울이라는 놈은 베게 밑에 숨어 있다가 어머니에게 보금자리로 다시는 돌아갈 수 없을 것이라고 속삭이나 보다. 워낙 깔끔한 성격인데 타인에게 은밀한 구석까지 내보여야 하기에 느끼는 수치심은 기저귀 안에 가둬두고 있지 않을까. 자신의 육신을 마음대로 움직일 수 없다는 좌절은 담요 속에서 이런 모습으로 살아서 뭐하냐며 어르고 달랠지도 모른다. 늙고 병들어 자식에게 짐으로 남겨진 슬픈 자존심이 ‘명랑’이라는 다른 모습으로 표출되는 것이리라.

어머니의 마음이 느껴지기에 더욱 마음이 아프다. 며칠 사이에 양어깨가 축 처졌다. 얼굴도 눈에 띄게 야위었다. 틀니를 뺀 입가에는 주름이 깊게 팼다. 자식에게 말하고픈 그러나 하지 못하는 서글픈 넋두리가 입꼬리에 매달린 듯하다. 눈은 금방이라도 가득 담긴 한을 쏟아 내려는 듯 충혈되어 있다. 보행기에 의존해 화장실에 갈 수 있을 정도면 퇴원할 수 있다는 간호사의 말에 용기를 불어 넣어드린다. 열심히 운동해서 L. A 다운타운의 야경이 훤히 보이고, 새로 짓고 있는 교회의 십자가 탑이 가까이 보이는 아파트로 돌아가시자고.

 

물리 치료사 두 명이 어머니를 따른다. 한 사람은 혁대 같은 띠를 어머니의 가슴에 두른 채 부축을 하고 다른 이는 휠체어를 바로 뒤에서 끌며 주저앉을 것을 대비한다. 허리를 쭉 펴고 발을 끌지 말고 들어 봐요. 걸어 보세요. 나한테 오세요. 어머니를 마주 보고 뒷걸음을 치면서 두 팔을 뻗어 응원한다.

어머니도 그랬겠지. 걸음마를 시작하는 내 앞에서 부드럽고 달콤한 목소리로 손을 내밀며 겁내지 말고 이리 온이라고 말 했겠지. 발자국을 뗄 때마다 기쁨과 환호의 손뼉을 치는 어머니의 품에 쓰러지듯 안기면 장하다 기특해하며 안아 주었을 것이다. 두 사람의 모습은 그대로인데 각자의 역할이 바뀌었구나.

 

저와 함께 걸으실래요? 자, 한 발자국씩 한 발자국씩.

소맷자락을 잡아당겨 어머니의 얼굴에 맺힌 땀을 살포시 품어온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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