봄은 어디에 / 신혜원

 

화창한 주말 아침이다.

오랜만에 화사한 정원이 나를 부른다. 나가보니 바람 한 점 없는 따스한 햇살이 나의 마스크를 벗긴다. ‘너도 햇볕에 일광욕을 해라.’ 이왕이면 소독도 되었으면 하고 마스크를 볕이 잘 드는 의자에 걸쳐 놓는다. '휴우 바로 이거야, 이제 살 것 같다.’ 나는 태양을 향해 두 손을 뻗고 숨을 들이쉬는데 이번엔 햇살이 따라 들어와 숨통을 활짝 열어준다.

 

어느새 날아든 새들이 재잘대기 시작한다. 새소리 들은 지가 얼마만인가 싶어 귀가 쫑긋해진다. 정원 한가운데에는 망가진 분수대의 테두리 시멘트만 둥그렇게 남아있다. 그리고 가장 눈에 띄는 장미꽃 나무가 사방으로 널려있다. 빨강, 주황, 분홍, 노랑, 보라, 흰색 등 봉오리부터 활짝 핀 꽃나무가 입구 주위와 담을 둘러싸고 있다. 유독 향이 짙은 주홍색 장미는 나를 더 머물게 한다. 다른 종류의 나무들도 있지만 우선 크고 작은 장미꽃나무만 세어보니 무려 50그루가 둘러싸여 있다. 몇 바퀴를 걸으며 살펴보니 아주 작은 나비들도 꽃에 앉아 소곤대고 날아간다. 다시 돌아오니 큰 호랑나비도 이곳저곳 살피며 꽃에 앉았다가 일어나기를 반복한다. 작은 벌레들도 기어 다니고 파리도 몇 마리 날아다닌다. 모두 정겹고 반갑다. 자연은 바이러스와 전혀 상관없이 예쁜 봄을 바로 이곳에 피우고 있다. 정원 한 가운데에 서서 저장된 국민체조를 틀어놓고 구령에 맞추어 동작을 따라한다. 정원 안에 있는 모든 생물과 빈 돌 의자들이 나의 관객이다. 사람은 아무도 나와 보지 않으니 마음껏 혼자 누린다.

 

최근 코로나 바이러스 비상사태로 모두 자가 격리를 시행해야만 한다. 바이러스 감염을 최대한 줄이고 예방하기 위해 집에 머물러야 된다. 이로 인해 신생아가 있는 둘째 아들과 며느리는 우리에게 제발 나가지 말라고 신신당부를 하고있다. 4월에 있는 나와 작은 며느리 생일에도 만나지 못하게 되었고, 5월 초에 있을 손녀 백일도 취소하겠단다. 이렇게 사랑하는 가족과의 만남조차 차단될 줄 누가 알았을까.

 

코로나 바이러스가 세상을 다스리고 있는 것처럼 사태가 점점 심각해진다. 사회적 거리 두기를 시행하기 위해 6 Feet 간격으로 마켓이나 은행, 약국 등 어디서든지 줄을 선다. 물론 서로의 감염예방을 위해 마스크 쓰는 일은 필수다. 빈 상가와 설렁한 거리에도 미세한 바이러스가 오직 사람만 겨냥하고 있다. 이미 모든 여행, 공공사무소, 사업체 등 단체 모임은 모두 폐쇄다. 앞으로 더 많은 곳에서 문을 닫게 되고, 실업률은 증폭되고 외출은 더욱 통제될 것이다.


우리가 자연 속의 봄을 한창 누려야 할 시기에도 불구하고 마스크에 기대어 봄을 잃어가고 있는 것 같아 안타깝다. 물론 생명을 잃은 수많은 가족의 슬픔에 비하면, 사경을 헤매고 있는 환자와 돌보는 의료진에 비하면, 직장이나 사업체를 잃고 봄을 느끼지 못한들 그게 무슨 비교가 될 문제인가. 내가 사는 시니어 아파트 건물 안에 있는 정원을 거니는 동안 맞은편 캘리포니아 병원 앞을 응급차가  두 차례나 지나갔다. 비행기와 헬리콥터가 지나가는 소리도 종종 들린다. 그럴 때 마다 가슴이 섬뜩해진다. 잠시라도 봄을 누리는 행복조차 사치가 될 까봐 더 큰 고통 속에 있는 자들에게 자꾸 미안해진다.


비록 봄의 기다림과 설렘이 식어지고 사라진다 하더라도 내 안의 봄을 잃고 싶지 않다. 비록 미세한 세균이 우리를 구속할지라도, 생명을 위협하더라도 포기하지 않겠다. 분명 살아남아 코비드-19을 회상하는 봄을 다시 맞이할 것이라고 믿는다. 그리고 그 어느 곳에서라도 찬란한 햇빛을 받으며 숨을 쉬고 오감을 느끼는 것만으로도 이미 너무도 소중한 봄을 누리고 있으니까.