공주 아무나 하나
“어부인 마님, 식사 하십시오.”
“아유, 매끼 식사 받아먹기 참 그러네.”
“고마워요 여보, 나 물좀,”
“커피는?‘
초여름에 내게 찾아온 행운의 마님 역할이다. 정말 내게 익숙하지 않고 어울리지 않는 공주 같은 마님 역할은 이렇게 시작되었다.
혼자 밀린 일 하며 집에서 뒹굴고 쉬고 싶은 어느 토요일, 낚시를 좋아하는 아들과 남편이 나를 불러냈다. 공기 좋은 빅베어 호수에 가서 푹 쉬다 오자고. 갈까 말까 망설이다가 그래도 남편과 아들을 위해서 아침 일찍 집을 나섰다. 아들은 잡히지도 않는 물고기를 잡기 위해 열심히 낚시 밥을 끼워 물에 던져놓고 최신형 작은 바너에 컵라면 한 개씩을 끓여댄다. 아침엔 호수가가 내게는 추웠다. 가져간 시집도 몇 줄 읽다가 담요를 무릎에 덥고 호수를 바라보았다. 몸이 안 좋은 탓인지 올라올 때 본 6월의 눈 쌓인 산도, 나무도 그 어떤 것도 특별한 시상을 떠오르게 해주지는 못했다. 결국 점심으로 사간 김밥과 라면을 먹고 나니 졸음까지 왔다. 피곤 탓인지 낚시도 산책도 아무것도 하고 싶지 않았다.
“얘, 너무 조용해서 고기가 잡히지 않는 것 아니니? 사람들이 많은 곳으로 가서 낚시 밥을 던져야 고기들이 점심 먹으러 나와서 잡히지 않을까?” 난 낚시에 대해 알지도 못하면서 던진 말이었다. 결국 아들과 남편은 자리를 옮겼다. 차를 타고 더 아래로 내려가 파라솔을 치고 분주한 작업을 하고 있었다. 난 차에 있겠다고 내려가지 않았다. 그때가 벌써 오후 1시가 지났으니 차안은 무척 더워져있었다. 쉬는 게 쉬는 게 아니었다. 나는 주섬주섬 소지품을 챙겨 밖으로 나왔다. 아들 있는 곳으로 내려가야 했다.
평탄한 길이 보이지 않았다. 아들은 어디로 내려간 것일까? 길을 찾다가 좀 가파르게 보였지만 쉽게 내려가려고 몇 발작 디디다 왼쪽 발을 잘못 디뎠다. 가속이 붙어 그만 앗 하는 순간 앞으로 고꾸라지고 바닥에 엎어졌다. 왼쪽 발목과 무릎, 팔꿈치와 어깨가 모두 아파서 일어날 수가 없었다. 한참을 누워서 끙끙대었다. 햇볕은 쨍쨍했다. 풀잎과 흙내음이 시원하게 내 코를 자극하면서 위로하는 듯 했다. 너무 볕이 뜨겁고 아프기도 해서 그냥 더 누워 있다가 남편을 불렀다. 목소리가 심상치 않았는지 두 남자가 달려와 나를 부축해서 겨우 차에 올랐다. 걸을 수가 없었다. 발목이 부어올라 테니스공만 했다.
부지런히 집 근처까지 달려와 세인트 빈센트 병원 응급실로 들어갔다. 여기저기 엑스레이를 찍은 결과 발목골절, 무릎파열이란다. 부목을 대어 붕대로 감은 채 목발 사용법을 알려주며 정형외과 전문의를 꼭 만나보란다. 간호사가 “어떻게 머리는 하나도 상하지 않았네요.”한다. 그렇다. 내가 머리를 들고 일어났을 때 내 앞에 큰 바위가 앉아 있었다. 내 키가 조금만 더 컷어도 내 머리는 큰 바위에 부딪쳐 살아남지 못할 수도 있었다. 생각만 해도 아찔했다. 그 어느 때 보다 감사한 마음으로 주말을 보내고 윌요일에 주치의를 만났다. “복숭아 뼈에 금이 가서 수술은 하지 않아도 되는데 그 뼈가 붙으려면 한 3개월 걸립니다.” “어머나 그래도 다행이다. 수술을 안 해도 되니까” 난 손뼉을 치며 좋아했다. 그만한 것이 벌써 다 나은 기분이 들어 마음이 가뿐해졌다.
사실 다친 날부터 나보다 남편이 가장 바쁜 자가 되었다. 우리의 식사준비는 물론 나의 손과 발이 되어 줘야했다, 혼자 할 수 있는 일들을 남편을 불러서 도움을 청하려니 미안하고 익숙하지가 않다. 외출 시 윌체어에 발 받침대를 끼고 빼는 일, 밀어주고 차에 태우고 내리는 일 등 나는 일어서는 일조차 부축을 받아야 했다. 환자를 도와주는 일에 익숙해 있었기에 환자가 되어보는 일은 더 어색하고 인내심이 필요했다. 직장에서 말버릇처럼 ‘아 쉬고 싶다, 이제 일 그만해야지, 왜 나만 이렇게 바빠야 돼?’ 하면서 불평불만이 쌓였다. 이렇게 환자가 되어 쉬고 있게 될 줄 어찌 상상인들 했겠는가.
누군가 말했다. ‘피할 수 없으면 즐기라’고. 정말 그렇다. 내 현실의 상황을 내가 만든 경우가 참 많다. 하지만 원하든 원치 않았든 피할 수 없이 주어진 일이라면 감사하며 즐길 일이다. 생각해보니 메디케어를 받은 후에 일어난 일이어서 의료혜택도 다 받을 수 있었고, 왼쪽 발만 다친 것도 얼마나 다행한 일인지 감사하기만 하다. 현 상황에서 나는 다리를 올려놓고 누워서 할 수 있는 일은 책 읽는 것과 스마트폰 사용하는 것이다. 그동안 못 읽은 책을 누워서 읽다 자고, 먹고 푹 쉬는 공주 같은 행복을 이렇게 누리게 될 줄이야.