눈은 마음의 창

   

못들으니  답답하구나.” 시이모님이 연속극을 보시다가 불쑥 하신 말씀이다

그래도 장님보다야 낫지언니.” 사촌 박대균 아들목사댁 방문중 모임에서 서로 우기셨다.

 

언니 시이모님은 귀가 멀었고 동생 시어머님은 각막이식 거부반응으로 시력을 잃었다 손톱  가시가 제일 아프고 보면 서로 자기의 처지가   든다고 우길 법도 하다. 뭐니 뭐니해도  못 보는  제일 답답한  같다눈앞이 캄캄하거나 하늘이 노랗다 등의 극한의 절망상태는 모두 눈의 지각과 관련된 표현이 많다.

 

눈은 마음의 창이라 한다. 인간이 외부로부터 받아들이는 인식의 70% 눈을 통해서라고 하니 틀린 말은 아니다. 거의 모든 정보가 시각을 통해 받아들여지기 때문에 <본다 것은 살아있다는 것과 동일시 여겨져 왔다.

 

어릴 적부터 단어 뜻 자체의 독립성 부재를 의아해 한적이 많았다예를 들면 우리 일상에서 <간다>  <간다> <본다> 합쳐 <가본다> 되는지 말이다. 해본다, 만저본다, 먹어본다, 웃어본다, 입어본다, 생각해본다, 살아보니, 만나보니  너무나 많다. 지금 생각해보니 행위나 사고 뒤에 마음으로부터 보는 행위가 첨가되어 완전한 행동을 이루어 자기체험을 극대화하기 위함이 아닌가 싶다.

 

교육이란 무엇인가 <볼줄 아는> 능력을 키우는 것이다. 겉 사람과 속사람의 어디를 보느냐에 삶의 질이 들추어진다. 어떤 눈은 평생 반려자를  선택한다. 그래서 앞을 내다볼 줄 아는 사람은 꿈을 꾸고 희망을 심는 사람, 훌륭한 사람으로 간주하기도 한다. 꿈을 품고 무엇을 심는다는 것은 시간과 인내를 미래에 투자하는 것이다. 목재를 심는 사람은 내일에 살고 인재를 심는 사람은 모든 미래를 사는 사람이다꿈과 비전을 훗날에 두고 의미를 부여하기 때문에 가치 있는 삶이 자기 몫으로 기다리고 있다.

 

사람은 우주의 중심이고 사람의 중심은 마음이다. 흡족한 상태의 마음가짐이 행복으로 가는 첫 번째 발걸음이라면 가치관의 변화가  열쇠일 것이다. 흔히 그것을 내적 안목이라 한다. 그렇다면 눈은 있는데   못 볼까. 가슴은 있는데  느끼지 못할까. 눈이 존재하는 목적은 보기 위함이요 가슴이 있는 까닭은 사랑에 반응하도록 함이다죄성에 갇힌 인간은 거의가 의식이 보고 싶어 하는 것만 보아 왔다의식이 제대로 느낌에 감응 못하는 정서 흉년에 살고 있는 요즘이고 보면 감격으로 설레는 가슴이 자꾸 냉담 쪽으로 기우는 게 무척 안타 깝다. 밑바닥 무의식에서는 기초공사인 감사가 있어야 인격의 빌딩이 서는데 말이.

  

감사할  영적 눈이 열리기 시작한다. 자유함에 이른다. 이때는 육체적 결함을 보완하고 제한된 자기수준을 뛰어넘는 힘이 솟아난다. 생의 의미파악도, 단절되었던 관계회복도, 치유도 이때 일어난다. 얼마나 신비한 현상인가. 생명의 네트워크 안에 들어온 증거이다.

 

대낮인데도 사방이 캄캄한 요즈음 세상이다고정관념의 색안경을 벗고, 편견의 안경을 버리는 길이 어두운 세상에서 넘어지지 않는 지혜다. 지식의 환한 불을, 때에 따라 끌 줄도 알고 완고한 고집의 두꺼운 눈곱을 닦으며 어두운 밤하늘의 별을 끌어다 가슴에 지닐 줄도 아는 사람이면 필요에 따라 발에 등을 달기도 하는 사람이.

 

눈을 가지고도 올바른 것을 안보는 병폐는 습관 탓도 있다. 구습에  자유로워질  있는 방법은 창조질서 안에서 동행하는 불빛 한 조각 지니면  몸이 열린 귀요,  마음이 환하게  눈이다. 이때 부족함이 없는 가지 무성한 포도나무는 모두를 위한 영성의 성장임을 알게 된다.

 

눈이  보는 것은 부분적인 불구다. 영혼이 눈을 뜨지 못하면 완전 불구다. 만져보니, 먹어보니, 가보니등 나머지는 상호의존적으로 몸이 보완해주니 감사할 뿐이다. <보기에  좋았드라> 완전한 시력을 가진  쪽에서   그가 빚은 피조물을 향해  극치의 순간에 그만이   있는 찬사다. 인간에게로 내려온  진리가 닫쳐진 우리 마음문을 두드리고 있다.  순간에도   세상에서는  진리에 도달 하려고 무모한 등반을 하고 있다. 이미 그는 내려와 우리 가운데 상주하고 있는 은혜의 때가 바로 지금인데, 이를 받아드리기만 하면 되는 것인데 말이다.

 

  보고  보는 세대,   눈의 대들보는 안 보고 남의 눈의 티만 보는 지극히 연약한 인간의 죄성을 가슴 아파한 사람이 있다. 나사렛 청년이다. 또 눈은 없지만 수많은 눈을 가진 헬렌 켈러란 사람도 있다. 그들은 지금도 살아있다. 어두운 세상을 광명으로 지속적으로 안내하고 있다. 바쁘다는 핑계로 나의 가슴은 냉담가슴은 아니었나! 이웃의 어려움에  멀지나 않았는지, 나는 어느 정도의 영적 시력 장애자일까 하고 곰곰이 자신을 점검해보는 주말 오후다.***

 

 

 

 
profile