세월이 다녀간 자리에서

 

                                                                                                              김윤희 

   어디론가 여행을 떠날 때면, 마음이 설레는 건 어른이나 아이나 마찬가지인가 보다. 정성 들여 싸놓은 가방을 열어 빠뜨린 것이 없는지 다시 한 번 챙긴 뒤에야 겨우 잠자리에 들었다. 하지만 들뜬 마음에 엎치락뒤치락하다가, 새벽녘에야 겨우 눈을 붙일 수 있었다. 끈질긴 알람 소리에 억지로 눈을 떴다. 침대 발치에는 배가 남산처럼 불룩해진 트렁크가, 밤을 꼬박 새우며 식구들이 깨어나기를 기다리고 있었다. 곯아떨어진 아이들을 다그쳐 깨워 차에 태웠다.

   차창을 두드리는 바람도 신바람이 난 듯 쉭쉭 휘파람을 불며 스쳐갔다. 사막을 가로질러 달리다 보면, 사람이 살 수 없을 것 같은 뜨겁고 황량한 들판 한가운데 가끔 외딴집이 시야에 들어왔다. 사회성이 원만하지 못한 사람들이 고립되어 사는 곳이라는 이야기를 친구에게 들은 적이 있다. 그러나 나는 오히려, 독자적인 사상을 지닌 아웃사이더들이 기성 사회의 틀을 벗어나 벌거벗은 자연과 공존하는 사색의 공간을 택한 것일지도 모른다는 생각이 들었다.

   자동차 엔진을 식힐 겸 잠시 휴게소에 들렀다. 차 문을 여는 순간, 후끈한 열기가 기다렸다는 듯 차 안으로 밀려들어왔다. '집 떠나면 고생'이라더니, 벌써부터 우리 집 창가를 스치던 태평양 바닷바람이 그리워졌다. 네다섯 시간쯤 달렸을까, 땅거미가 슬그머니 기어들기 시작했다. 시간이 흐르자 전방 저 멀리 신기루처럼 아른거리던 희미한 불빛들이 점점 또렷해지고 있었다.

   밤의 도시, 도박의 메카 라스베이거스. 휘황찬란한 위용이 시네마스코프 스크린처럼 눈앞에 펼쳐졌다. 20세기 초, 캘리포니아와 유타주 솔트레이크시티를 잇는 철도가 완공되면서 현대적인 도시로 건설되기 시작한 이곳은, 이제 미국인뿐 아니라 세계인의 관광지이자 도박 도시가 되었다. 세계 곳곳의 상징적 건축물과 구조물을 모방한 카지노 호텔들이 관광객과 도박꾼들을 유혹하고 있었다. '불야성'이라는 명성이 그야말로 명불허전이었다.

  그랜드캐니언의 일출을 직접 보기 위해 새벽길을 나섰다. 전조등을 밝히고 칠흑같이 어두운 프리웨이를 끝없이 달려 현장에 도착했다. 억겁의 세월이 빚어낸 기기묘묘한 대계곡이 여명에 젖어가는 광경은, 그야말로 필설로 형언할 수 없는 장관이었다. 웅장하고 숭고하며 유아한 대자연이 눈앞에서 파노라마처럼 펼쳐졌다. 그 앞에 서니, 인간은 한갓 왜소하고 초라한 존재에 지나지 않는 듯했다.

   아스팔트길을 녹일 듯한 불볕더위를 뚫고 브라이스캐니언에 도착했다. 침식과 풍화 작용으로 빚어진 브라이스 계곡은 마치 거대한 신전 같았다. 거북이 등껍질처럼 갈라진 자이언캐니언은 자연과 세월이 오랜 시간 동안 부수고 쪼고 갈고 닦아 완성한 합작품이었다. 그 절경 앞에서 입을 다물지 못하고 감탄하는 관광객들 속에 섞여, 다시 한 번 인간이 얼마나 미미한 존재인가를 절감했다.

   수천만 년 전부터 지금까지 이어져 온 대역사의 현장을 한눈에 담을 수 있다니, 그저 영광스럽고 감탄스러울 뿐이었다. 세월이 남긴 깊은 흔적들은 뇌리에서 쉽게 지워지지 않았다. 대자연 앞에서 인간의 삶은 그저 찰나에 지나지 않는 것이 아닐까. 하릴없이 흘려보낸 나날들이 부끄럽기 짝이 없었다. 그렇더라도 어쩌겠는가. 늦었다고 후회할 때가 오히려 가장 적절한 시작의 순간이라는 말을 스스로 위안 삼아본다. 인생은 육십부터라는데, 나는 이제 겨우 불혹의 문턱을 넘었을 뿐이다.

   비 온 뒤 개미 발자국처럼 작더라도, 나만의 작은 흔적을 남기기 위해서는 지금 이 순간을 진심으로 살아야겠다는 생각이 들었다. 지나온 시간, 그리고 앞으로 나아갈 시간 속에서 때로는 넘어지고 때로는 주저앉더라도, 그 모든 순간이 결국은 나라는 존재를 완성해 가는 여정이 될 것이다. 세월이 다녀간 자리마다 부끄럽지 않은 나의 이야기가 조용히 피어났으면 좋겠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