생명의 선물,남긴 사랑

 

                                                                                                                     김윤희 

 

  꽃구름 사이로 쏟아지는 가을햇살이 유난히 눈부시던 날, 나는 준비되지 않은 이별을 위해 로즈 힐 공원묘지로 향했다. 나지막한 산언덕에 드넓게 자리를 잡은 묘역은 양지가 바르고 멀리 LA 시내가 한눈에 들어와 풍수지리의 묘리가 무엇인지 모르는 내 눈에도 명당자리처럼 아늑하고 평온해 보였다.

 

  옷깃을 여미며 조문객들을 따라 스카이 채플로 들어섰다.

미소를 머금은 고인의 영정 사진과, 생전의 따스한 모습을 담은 영상이 조용히 우리를 맞았다. 평소 말수가 적고 성품이 온화했던 그녀는, 불과 석 달 전까지만 해도 수줍은 미소로 눈인사를 건네던 교회 구역 식구였다.

 

  어느 날부터인가 그녀는 잦아지는 두통과 급격히 나빠지는 시력을 걱정하며 병원을 찾았다가 뇌종양이라는  믿기 힘든 진단을 받았다. 석 달 가까이 투병 생활을 이어가다 뇌수술을 받았지만, 의식을 되찾지 못한 채 뇌사 상태에 빠졌고, 열흘도 채 되지 않아 향년 서른아홉의 짧은 생을 마감했다.

 

  인생은 한 순간의 꿈과 같다고는 하지만, 백세를 사는 시대에 접어든 오늘날, 반백 년도 채 살지 못한 채 허망하게 떠난 젊은 영혼 앞에 모두가 망연자실해 서 있었다. 죽음이 무엇인지도 제대로 알지 못하는 어린 자녀들, 갑자기 아내를 잃은 남편, 그리고 자식을 먼저 보낸 노부모들. 그 앞에서 위로의 말 한마디조차 쉽게 꺼낼 수 없었다. 그 차가운 침묵 속에서 고인의 여동생은 애통함을 애써 삼키며, 차분하게 추모사를 낭독했다.

 

 그녀는 죽음을 예감했는지, 수술실에 들어가기 전에 자신이 깨어나지 못할 경우 장기 기증을 해달라고 부탁했다고 한다. 평소 남다른 배려심을 지닌 그녀다운 결단이었다. 가족들은 고인의 유언과 의사의 권유를 따라 여러 명의 환자들에게 새로운 삶의 기회를 나누어 주었다. 정말로 살신성인이라 할 수 있는 선택이였다. 생면부지의 사람들에게 새 삶을 선물하고, 담담하게 죽음을 맞이한 그녀의 고귀한 헌신은 이 세상에 한 줄기 빛처럼 남았다.

 

  그녀의 삶은 자신을 아낌없이 내어주는 한 그루의 나무와 같다는 생각이 들었다. 늘 푸른 잎으로 그늘을 만들어 더위를 막아 주고, 열매를 맺어 누군가에게 기쁨을 선사하다가, 어느 날 갑자기 베어져 가는 그런 나무와 닮았다. 나무는 베어져도 인간의 생활 속에서 유용한 물건으로 다시 태어난다. 가구나 식탁, 의자, 종이 등으로 변신하며, 때로는 자신을 태워 추위에서 사람들을 지켜주기도 한다. 그 무엇 하나 버려지는 것 없이 자신의 소명을 다하며 끝나는 것 같지만, 영생을 얻으며 사라지지 않는 것이 나무의 본질인 것이다.

 

  애써 내 자신을 추스리려 해도 귀갓길 발걸음이 천근만근 무겁게만 느껴졌다. 그녀와 마지막 이별을 고했지만, 마음속으로는 그녀를 보내 지지가 안않다. 그녀가 세상을 사랑한 만큼, 나는 과연 세상을 사랑할 수 있을까? 지금까지 나는 남들에게 무엇을 베풀며 살아왔는가? 아무리 곰곰이 생각해 보아도 내세울 만한 것이 별로 없다는 생각이 들었다. 자주 사랑을 말하지만, 진정한 마음을 담아왔는지 되돌아보게 되었다.

 

  가을햇살이 눈부시던 날, 그녀는 떠났다. 석별의 눈물을 훔치며 뒤돌아선 지가 마치 어제 일처럼 선명한데, 지금은 겨울의 문턱에 들어선 가로수에 낙엽이 떨어지고 있다. 시간은 한 치도 지체하지 않는다고 하더니, 기쁨과 슬픔을 거두며 쉬지 않고 흐르고 있다. 우리는 모두 자신에게 주어진 시계바늘이 언제, 어느 순간에 멈출지 알 수 없다. 불투명한 인생 속에서, 우리가 낙엽이 되어 흙으로 돌아갈 때, 무엇을 남기고 갈 것인가.

 

  따스한 햇살처럼 세상을 밝혔던 그녀의 빈자리는 여전히 아픔으로 남아 있지만, 세상에 향기로 남아 있을 그녀를 떠올리며 조금이나마 위안을 얻는다. 지금 이 순간, 누군가의 가슴 속에서 힘차게 뛰고 있을 그녀의 심장 박동 소리가 그리움으로 남아 귓전에 맴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