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계절을 잊은 꽃처럼
김윤희
이민자로 살아온 세월이 어느덧 서른 해를 넘겼다. 낯선 풍경에 부딪치며 흔들리던 날들도 많았지만, 어느새 이곳은 내 삶이 깊이 뿌리내린 또 하나의 고향이 되었다. 가까이 드넓은 태평양이 있어 여름이면 에어컨 없이도 시원한 바람이 불어오고, 겨울에도 푸른 잔디와 이름 모를 꽃들이 사철 피고 진다. 그럼에도 계절마다 모습을 달리하는 고국의 사계절은 문득문득 그리움으로 다가온다.
한국의 계절은 늘 시처럼 흐르며 기억의 페이지마다 향기와 색을 남긴다. 봄이면 노란 개나리 사이로 아지랑이가 아른거리고, 연분홍 진달래가 언덕을 수놓는다. 여름이면 짙은 녹음이 대지를 감싸고, 해를 닮은 해바라기는 하늘을 향해 눈부시게 피어오른다. 그러나 내 마음에 가장 오래 머무는 계절은 언제나 가을이다. 황금빛 들판은 바람 따라 넘실거리고, 산들은 단풍빛으로 천천히 물들어 간다.
나는 코스모스를 좋아했다. 여고 시절, 모교 운동장 맞은편 넓은 공터는 입학 때부터 상가가 들어선다는 소문이 돌았지만 졸업할 때까지 그대로 비워져 있었다. 1학년 가을, 바람이 가져온 선물인지 누군가의 손길인지 알 수 없었지만 그곳에 코스모스가 피기 시작했다. 해마다 스스로 씨앗을 퍼뜨리며 꽃밭은 점점 넓어졌고, 사람들은 그 앞에서 사진을 찍으며 추억을 남겼다. 한들한들 꽃물결은 어느새 계절이 마련한 소박한 축제장이 되었다.
공터에서 이어진 대로변에는 이삼백 미터쯤 코스모스 길이 펼쳐졌다. 토요일 하굣길, 친구들과 꽃길을 걸을 때 바람에 흔들리는 꽃들은 손짓하듯 우리를 반겼고, 우리는 날아다니던 고추잠자리처럼 들뜬 마음으로 그 속을 뛰놀았다.
재작년 여름, 친구 집들이에 가던 길에 어느 집 정원에 화사하게 피어 있는 꽃들이 시선을 붙잡았다. 가까이 다가가 보니 코스모스였다. 타국에서 다시 만난 꽃이 그날따라 유난히 반가웠다. 들뜬 마음으로 친구에게 이야기하니 원산지가 멕시코라며 히스패닉 동료에게 모종을 부탁해 보겠다고 했다.
이듬해 여름, 촉촉이 비가 내리던 날 친구는 코스모스 모종 다섯 포기를 들고 우리 집을 찾아왔다. 비 오는 날 심으면 더 잘 자란다며 창가에서 가장 눈에 띄는 화단에 심어 주었다. 여름에 코스모스라니 반신반의하면서도 꽃망울이 트기를 기다렸다.
몇 주가 지나자 흰색·연분홍·진분홍 꽃봉오리가 차례로 터졌다. 한 송이가 지고 나면 다른 가지에서 다시 꽃잎이 열렸다. 작은 몽우리들은 바통을 넘기듯 서로의 순간을 이어 갔다. 한국에서는 가을에만 보던 꽃이었는데, 처마 끝 크리스마스 장식불 아래서도 여전히 한들거린다. 마치 나를 기억하듯 꽃들은 환하게 피어나 미소를 건네는 듯했다.
꽃들을 바라보다 문득, 고교 졸업을 앞두고 아르헨티나로 이민을 떠난 뒤 소식이 끊겼던 친구 J가 떠올랐다. 오래전 추억 속에만 머물던 친구를 이번에는 꼭 찾고 싶었다. 마침 교인 중 아르헨티나에서 오래 살다 미국으로 건너온 분이 있었고, 우연처럼 J의 부모님과 인연이 있다는 이야기를 들을 수 있었다. 그 인연이 다리가 되어 마침내 J와 연락이 닿았고, 전화와 카톡으로 밤이 깊도록 대화는 멈추지 않았다.
내년 여름, 만나기로 한 그날을 손꼽아 기다린다. 끊어진 줄 알았던 우정은 극적으로 이어졌고, 내 안에 묻혀 있던 그리움도 조용히 숨을 되찾았다. 우정이란 어쩌면 계절을 잊은 코스모스처럼, 말없이 때를 기다리다 어느 날 불현듯 꽃처럼 피어나는 것인지도 모른다.
지나간 줄만 알았던 순간들, 잊힌 듯 스쳐간 친구들 역시 마음 한켠에서 언젠가 다시 피어날 날을 기다리고 있었던 게 아닐까. 영원한 우정을 다짐하며 장난스럽게 외치던 우리들의 구호처럼 (“This member, remember. Forever ! ”) 소중했던 순간들도 계절을 잊은 꽃처럼 다시 피어나리라.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