엄마는 울지 않으셨다

 

     엄마는 늘 우리 세 모녀가 한 나라 안에서 가까이 사는 것 하나로 행복하고 감사하다고 했다. 긴 세월 아빠와의 사별로 외롭고 고된 삶을 사셨기에 부부가 함께 있는 것이 가장 큰 감사라고 하며 두 딸의 결혼생활이 경제적으로 조금 부족할지라도 부부와 가족이 동거하는 것만으로 흡족해 하셨다.

 

     목회를 하던 동생네 가족이 선교사로 부르심이 있어 에티오피아, 굼즈로 떠나게 되었다. 그때 당시 선교사들이 아무도 지원하지 않은 험한 땅, 살인 부족들이 사는 그곳에 어린 조카들을 데리고 떠나는 동생을 이해하기 어려웠다. 엄마에게는 그 당시 에티오피아에 대한 현지 상황 설명은 못하고 주의일 열심히 하며 자주 오겠다고 하고 떠났다.

 

     어린 시절 나는 동생을 돌보아야 하는 시간이 많이 있었다. 엄마와 할머니가 가게로 나가시고, 날씨가 추울 땐 옆집 친구들을 불러 밖에 나가지 않고 집에서 놀았다. 아랫목이 식을까봐 이불하나 펼쳐놓고 그 속에 발들을 집어넣고 학교 놀이도 하고 옛날이야기도 하며 엄마와 할머니를 기다렸다. 무서움을 잘 타던 동생이 귀여워 귀신이야기를 해주면 동생은 등을 벽에 꼭 붙이고 내 손을 놓지 않으려 했다. 그 겁 많은 동생이 살인부족이 사는 곳으로 전화도 되지 않는 곳으로 떠났다. 몇 년간을 동생이 보고 싶어서 울었고, 무서운 일 당하지 않도록 기도하며 울었다.

 

     엄마는 울지 않으셨다. 어떤 곳이라도 부부가 함께 있으니 괜찮다고 하셨다. 하나님의 일 하는 것이니 하나님께서 지켜줄 것이라고 하셨다. 만년 소녀 같은 우리 엄마가 고된 삶을 사느라 강해졌다고 생각했다. 엄마는 정말 울지 않으시는 줄 알았다.

 

     몇 년 후 큰형님의 형제 초청으로 우리 가족마저 미국에 와야 했다. 미국에 가서 내가 시민권을 따면 바로 엄마를 모시고 오겠노라고 하고 떠났다. 이민 온 지 2년쯤 되었을까? 전화가 왔다. “별일은 아닌데 병원에서 보호자가 있어야 한다고 해서...” 병원에 알아보니 엄마가 자궁암에 걸리셨단다.

 

     믿기지 않았다. 놀란 가슴을 진정시킬 수가 없었다. 빨리 한국에 가야겠다는 마음에 이제 겨우 질서가 잡혀가는 미국생활은 아무 문제가 되지 않았다. 패턴메이커로 수많은 의류회사에 이력서와 면접을 거쳐 겨우 얻은 직장이었지만 한 치의 미련 없이 사표를 던지고, 한국행 비행기를 타고 가며 계속 기도했다. 시어머니는 친정엄마보다 19년이나 연상이시다. “하나님, 엄마도 시어머니처럼 장수할 수 있도록 도와주세요.”

 

     한국에 가자 엄마는 미국생활을 뒤로하고 달려온 딸에게 미안해하신다. 당신 예금통장을 주시며 수술비와 미국에 생활비로도 조금 보내라고 하신다. 생활력 강한 엄마는 노년에도 자식들이 못하게 할까봐 말도 없이 일을 하셨단다. 그 돈을 모아놓으신 것이다. 엄마는 수술과 항암치료도 잘 이겨내셨다. 수술 후에 병실에서 매일 발 마사지도 해드리고 처음으로 엄마와 대화를 많이 할 수 있는 기간이었다. 대화 중에 무심코 엄마에게서 나온 말이다. 비행기, 비행기 소리만 들으면 가슴이 쿵 내려앉는 것 같고 아리고 아프셨단다. 난 엄마를 몰라도 너무 몰랐다. 두 딸의 가족을 다 태우고 떠난 비행기를 보며 속으로 흘려보낸 눈물이 모여 암이 되었던 것이다. 마음이 너무 아팠다.

 

     감사하게도 동생네 가족은 15년간 에티오피아 선교사역을 마치고 이곳 훌러신학교에서 박사과정을 공부해 선교사 훈련 사역을 하도록 미국 캘리포니아로 올 수 있게 되었다. 우리 세 모녀의 온 가족이 미국에서 다시 모일 수 있게 된 것이다. 미국에온 동생도 한국에 올 수 있었다. 함께 간병을 하다 엄마를 미국으로 모시고 왔다. 함께 오는 비행기에서 엄마에게 비행기 소리 괜찮으냐고 묻자, 딸들과 함께하는 비행기 여행이라 너무 행복하다고 하신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