신대륙을 향한 갤릭Gaelic호의 애환
양상훈
올해로 미주한인 이민정착 122주년을 맞이하게 된다.
미국 이민정책의 근본바탕은 개국한 선조들의 건국이념인 자유 평등 정의의
정신을 실현코자하는데 뿌리를 두고 있다, 세계이민자들이 그 소망의 땅으로 미국을 향하여 몰려오고 있었다. 한민족의 이민사도 돌아보면, 1902년 11월 조선말 고종이 하와이 농장주들의 요청에 이민을 허락함으로서 한인 노동자 이민의 물꼬를 트였다. 1902년 12월 22일 Gaelic호를 타고 아메리칸 드 림을 품은 채 인천 제물포 항을 기약 없이 떠난 게 첫 이민이다.
이들은 고향땅을 떠난 제물포항구의 뱃고동이 망국의 황혼 빛 ‘갤릭호’ 기폭 에 눈물 젖은 생이별이었다. 22일간의 항해 끝에 102명중에 신체검사로 노동 자 16명이 탈락하여 최종86명만이 허가를 받아 하와이에 상륙하게 되었다. 이민자들이 하와이에 도착2년 후 대한제국은 외교권을 상실했다. 이어 5 년후 국권마저 상실한 ‘디아스포라’ 민족이 되어버렸다.
낮 서른 땅에 상륙한 이민자들은 척박한 사탕수수밭 뙤약볕 농장에 하루벌 이 50센트로 분홍빛 꿈은 멀어가며 불안이 짙어갔다.
그 당시 특이한 현상은 한인노동자 대부분이 남자로 구성되어 결혼을 하여 가정을 이루기를 원했으나 한인여성이 거의 없어 불가능한 상황이었다. 또한 동양인과 미국인과의 결혼을 금지하는 ‘동양인배척 법’이 있었기 때문에 현 지인과도 결혼을 할 수가 없었다. 더구나 결혼하러 한국에 다녀온다는 것은 거리와 비용 탓에 상상할 수도 없었다.
이때에 궁여지책窮餘之策으로 기발한 아이디어가 사진결혼이었다.
서로가 중매인을 통하여 사진을 교환했다. 신붓감이 신랑감을 만나러 하와이 로 건너오는 방법이다. 1910-1924년까지 약 1000여명의 사진신부가 하와이 에 들어온 것이다. 사진만 보고 결혼하러 다 보니 우습기도하고 슬프기도 한 에피소드가 참 많았다. 노동이민 온 총각들은 결혼비용을 마련하기위해 10년 이상 부지런히 일해서 저축을 해야만 했다. 그러다보니 늙은 신랑과 어린 신 부가 맺어지는 경우가 대부분으로 그들의 평균 나이차이는 무려 15살이나 되었다. 이렇게 해서 건너온 아가씨들에게 기다리고 있는 것은 연분홍빛 금의 환향錦衣還鄕꿈이 아닌 척박하고 힘든 고생의 나날이었다. 낮에는 사탕수수밭 에서 중노동을 했고 밤에는 삯바느질을 하여 오로지 자식과 자식교육에 혼신 을 다하였다. 열악한 환경에서도 교회를 설립하고 교육기관에 투자하여 후대 에게 민족정체성과 전통문화를계승하는열성을다하였다.
힘들고 고단하고 모든 일이 순탄치 않았을 노동이민자들 이지만, 이민선조들 은 조국을 위해 쌈짓돈을 모아 해방 전까지 무려 3백만 달러가 넘는 자금을 보냈으니 그 환경상황에 애국심이 대단하였다. 현재 재미한인인구는 약 260 여만 명으로 하와이에만 5만 명에 이른다.102명으로 출범한 이민자수가 한 세기만에 놀라울 만큼 증폭한 현상이다. 미연방의회는 그동안 재미한인들의 개척적인 삶과 미국사회에 기여한 헌신적인 활동과 업적을 높이 평가하여 한 인 이민의 역사가 시작된 1월 13일을 ‘미주한인의 날’로 선포하였다. 매년 이 를 기리는 성명 등을 놓치지 않은 채 발표하고 있다. 현란한 하와이 호놀룰루 항구의 7번 부두에 뱃고동소리 울리는 가운데, 선조들이 개척한 이민역사의 숭고한 애국심을 기억하기위한 표지 석에 갤릭Gaelic호 애환이 새겨져 있다. 유서 깊은 이민종가로서 ’알로하 스테이트Aloha State’의 역사적인 랜드 마크로 자리잡고있다.
이민의 역사가 1902년에 시작되어 123년이 되었네요. 많은 어려움과 고통을 겪어 이제는 미국땅에서 자랑스러운 미주 한이이 되었네요.