마법의 순간 / 조미순
우물 옆에 작두샘이 보인다. 주물로 된 작두샘은 손잡이 긴 주전자가 파이프에 올라앉은 형상이다. 1960년대를 재현한 동네에서 어린 시절 기억을 깨우는 풍경에 끌린다. 우물 속으로 두레박을 내려 까만 물거울을 깬다. 찰랑찰랑 퍼 올린 물을 작두펌프에 붓는다. 동시에 손잡이를 철컥철컥 아래위로 움직인다. “순아~ 뽐뿌질 좀 해도.” 엄마의 목소리가 환청인 듯 귓전을 스친다.
우리 집은 세탁소를 했다. 손님들이 맡긴 옷을 기계처럼 빨아대는 엄마가 열 살 아이 눈에도 힘겨워 보였다. 나는 고사리손을 보탰다. 펌프에 마중물을 부으면 그냥 실린더 밑으로 빠지기 일쑤였다. 커다란 손잡이에 매달려 폴짝폴짝 뛰었다. 쿨럭쿨럭 몇 번이나 물을 삼키던 펌프가 마침내 주둥이로 쏴아 물을 뿜어냈다. 엄마의 세탁통에 맑은 물이 차올랐다. 한 바가지의 물이 마법을 펼치는 순간이었다.
카야는 먼지 앉은 성경 속표지에 쓰인 알파벳을 골똘히 들여다보았다. 목젖에서 “미…스…캐서…린”이란 음들이 조심스레 맴돌았다. 그녀는 다시 처음부터 읽었다. “미스 캐서린 대니엘 클라크” 작두샘에서 쏟아지는 물처럼 터져 나온 음들이 그녀의 이름이었다. 낯선 듯 익숙한, 다른 이름들도 하나하나 발음했다. 뿔뿔이 흩어진 엄마와 아빠, 언니와 오빠들이 카야의 부름에 한자리에 모인 듯했다.
카야는 델리아 오언스 소설 《가재가 노래하는 곳》의 주인공이다. 술꾼에 폭력적인 아버지 때문에 엄마가 집을 나간 뒤 매질을 견디지 못한 아이들도 가출한다. 어렸던 카야는 집에 남지만 아버지의 종적이 묘연해지면서 혼자가 된다. 습지의 낡은 판찻집에서 수동식 통통배로 홍합을 잡고, 훈제 생선을 만들어 팔아 근근이 연명하는 열 살 아이. 실낱같은 희망도 없는 나날 속에 오빠 친구가 손을 내밀어 준다. 테이트는 문맹인 카야에게 최선을 다해 글을 가르친다. 습지의 생물들을 사랑하지만 표현할 수 없었던 그녀에게 마중물을 부어준 것이다. 카야는 그동안 모은 조개나 새의 깃털에 라벨을 붙이고 틈틈이 시도 쓰게 된다. 마침내 바닷조개와 해안의 새에 관한 책을 출간한다. 습지 전문가로 우뚝 선다.
어린 카야가 문맹의 어두운 터널을 벗어나는 과정을 나는 아프게 바라봤다. ‘그때’ 내가 테이트 같은 마음가짐이었다면 결과가 달라졌을까. 책장을 넘기는 내내 실타래가 엉키듯 머릿속이 복잡했다. 구순을 바라보는 연세에도 ‘무식無識의 한恨’을 안고 사는 엄마가 자꾸만 생각났다.
“은행 가갖고 넘의 손 안 빌리고 돈을 찾고 싶데이.”
태평양전쟁 시기에 초등학교 1년을 다닌 것이 학력의 전부인 엄마다. 중학생이던 내게 한글을 가르쳐 달라고 할 때 답답했던 심사를 이렇게 표현했다. 은행 문턱 넘을 때마다 용지 써줄 사람을 물색하며 부끄럽고 불안했다고도 했다. 엄마의 절박함이 내겐 와닿지 않았다.
그래도 잠깐씩 글을 봐 드렸다. 한글 쌍받침이 들어가는 글자를 헛갈려할 뿐, 소리 나는 대로 단어를 표기해 소통은 가능했다. 엄마는 책 읽기를 통해 문자를 익혔다. 더듬더듬 문장을 읽는 엄마 옆에서 단어가 막히면 내가 노트에 쓴 다음 발음과 뜻을 설명했다. 궁금증이 풀려갈 때마다 엄마의 얼굴은 기쁨으로 빛났다.
사십 대 초반이면 뭐든 도전하고 해낼 수 있는 나이였다. 그러나 가장이 집 밖으로 도니 세탁소 일은 엄마 몫이 되었고, 오 남매 뒷바라지도 벅찼다. 자투리 시간을 활용하려면 부족한 잠을 더 줄여야 했으나 엄마는 배움의 의지에 차 있었다. 문제는 나였다. 한 달쯤 지나자 내 공부가 바쁘다며 꽁무니를 뺐다. 펌프질하려고 야무지게 손잡이를 쥔 사람을 두고 마중물을 찔끔 붓다가 도망친 격이 되었다.
몇 년 전에 수필집을 냈다. 내 책을 어렵게 읽어 낸 엄마가 뭔가를 끄적이기 시작했다. 당신의 삶이, 도란도란 들려준 지난날 추억이 녹아있는 딸의 수필을 읽자 연필을 잡고 싶으셨단다. 아직 못다 한 얘기가 딸자식의 필력을 빌려 작품으로 탄생하길 바라며 용기를 낸 것이다. 누렇게 바랜 노트에, 광고지 여백에, 달력 뒷장에 연필로 삐뚤빼뚤 써낸 일상이 내 책상에 조금씩 쌓이고 있다.
엄마의 글은 의욕과 달리 안개 속을 헤맨 듯하다. 고단했던 삶보다 쓰는 게 더 힘들다는 노모. 그래도 옹이진 손가락으로 꼭 잡은 연필을 놓지 않는다. 나는 구순 넘어 시인이 된 여성의 작품 한 편을 엄마에게 들려준다.
있잖아, 불행하다고/ 한숨짓지 마// 햇살과 산들바람은/ 한쪽 편만 들지 않아// 꿈은 평등하게 꿀 수 있는 거야// 나도 괴로운 일/ 많았지만/ 살아 있어 좋았어// 너도 약해지지마
사바타 도요 <약해지지마> 전문
엄마의 입가에 미소가 어린다. 고개를 끄덕이며 나와 눈을 맞춘다. 엄마의 작두샘에서 울컥울컥 문장들이 쏟아져 나올 날을 기대한다. 오랫동안 잊혔던 마법의 순간이 다시 시작되고 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