쉼표 구간 / 이혜경
대학 입시가 코앞으로 다가오면서 아이는 하루의 시작과 끝을 피아노 소리로 채웠다. 말이 좋아 방학이지 연습실에서 종일 피아노 앞에서 음표와 씨름하느라 몸도, 마음도 지쳐 보였다. 모든 에너지를 쏟아부어야 하는 시기라 몸 잘 챙기라는 당부 외에는 보탤 말이 없었다.
여느 때처럼 늦은 밤까지 연습을 하는 아이를 차에서 기다리고 있었다. 현관에서 나오는 모습에서 평소보다 어두운 기운이 느껴졌다.
“엄마, 나 손이 아픈데 느낌이 안 좋아.”
년 전에도 손목 염증으로 고생한 터라 걱정이 되는 모양이었다. 손이 아프다는 말에 심장이 쿵 내려앉는 기분이었지만 병원 가서 약 먹고 치료를 받으면 금방 좋아진다는 말로 안심시켰다.
날이 밝자마자 병원으로 달려갔다. 예전부터 다니던 정형외과라서 의사 선생님도 아이가 피아노를 전공하는 학생이라는 것을 알고 있었다. 엑스레이 판독지를 확인한 선생님이 한숨부터 쉬었다.
“아이고, 어쩌나! 손을 안 써야 낫는데 큰일이다.”
가벼운 염증이 아니라 인대가 찢어진 상태였다. 손목을 과도하게 사용하는 바람에 찢어지지 않은 다른 부분도 부은 상태라 심각했다. 약도 먹고 물리치료도 하겠지만 가장 확실한 치료법은 손을 쉬는 것이라고 하니 입시를 앞두고 이런 날벼락이 없었다.
병원에 다녀온 뒤부터 아이와 나는 대립각을 세웠다. 며칠이라도 완전히 손을 놓고 쉬어야 빨리 회복이 된다는 내 말이 먹히지 않았다. 아이는 치료를 받더라도 아예 연습을 안 할 수는 없는 노릇이니 시간을 조금 줄이겠다고 했다. 지도 선생님도 짧고 굵게 푹 쉬고 나아서 더 열심히 연습하는 게 낫겠다고 하는데도 고집을 꺾지 않았다. 불안한 마음에 무리하다가 회복이 더디어지게 생겼으니 속이 터질 노릇이었다. 곧 치르는 실기시험 곡 중 하나가 완성되지 않았다는 이유로 악보를 내려놓지 못했다. 마음 같아서는 손을 묶어놓고 싶을 정도로 답답했다.
일주일 이상 소염제를 먹고 물리치료까지 받은 후에도 차도가 없었다. 그도 그럴 것이 하루에 몇 시간씩 피아노 건반을 누르니 인대가 회복될 리가 만무했다. 다음 치료 단계로 넘어가서 인대에 주사를 여러 번 맞기로 했다.
주사를 맞고 온 날은 통증도 심하고 붕대를 감고 있어야 해서 강제로 연습을 중단할 수밖에 없었다. 처음에는 집에서 시간을 보내는 일이 어색한지 잠만 자던 아이가 나중에는 밖으로 나와서 수다도 늘어놓고 연주회 영상도 찾아보면서 짧은 쉼표에 적응했다. 오로지 연습으로만 빼곡히 채웠던 오선지에 모처럼 쉬는 마디가 생겼다.
손목의 통증을 안고 개학을 맞았다. 조퇴를 쓰고 치료를 받으러 다니느라 연습할 수 있는 물리적인 시간이 확 줄었다. 평소보다 연습량을 채우지 못한 데다 손목 컨디션마저 정상이 아니니 아이는 조바심을 냈다. 마지막 실기시험은 올림픽 정신을 떠올리며 참가 그 자체에 의미를 두라고 당부했다. 부상을 입은 선수가 기권하지 않고 나오는 것만 해도 박수를 받을 일이라며 점수가 떨어져도 실망할 필요가 없다고 미리 보호막을 만들었다.
시험 당일, 오히려 평소보다 편안해 보이는 얼굴이었다. 손이 아픈 채로 치는 마당에 좋은 점수를 받는 것이 더 이상하다며 마음을 비웠다고 했다. 멘탈이 약해서 늘 걱정이었는데 어쩔 수 없는 상황인지라 저도 마음을 내려놓은 듯 보였다. 예전 같으면 배 아프다고 아무것도 안 먹고 나갔을 텐데 중간에 힘이 빠지면 안 된다며 밥도 먹고 가는 여유를 보였다. 한 번 쉬어간다고 생각하고 점수에 대한 부담감을 완전히 내려놓으니 긴장이 덜 되는 모양이었다.
실기시험이 끝난 후 한동안은 아예 연습실 근처에도 가지 않았다. 컨디션 회복이 안 된 손목이 얼마나 큰 핸디캡인지 온몸으로 절감한 후라서 며칠이라도 온음표로 쉴 결심을 할 수 있었다. 고등학교에 들어간 후에 처음으로 맛보는 긴 마디의 휴식 시간이었다. 유행이 지난 시트콤을 찾아보며 깔깔거리고 동생과 장난을 치는 모습이 새삼스러워 보였다. 그동안 저렇게 놀고 싶은 마음을 꾹꾹 참고 지내느라 숨이 가빴을 것이다. 이렇게라도 잠시 숨을 고르는 시간이 주어지는 바람에 새로운 에너지를 얻었으면 좋겠다는 마음으로 그동안 못 먹었던 집밥을 실컷 챙겨 먹였다.
밖에서 볼일을 보는데 카톡이 쉴 새 없이 날아왔다. 아이가 연달아 보낸 메시지였다. 숨이 넘어가도록 재촉을 해대는 알림음에 창을 열었다. 조례 시간에 실기 성적표를 받았는데 자기 예상과 다르게 나왔다고 했다. 지난 학기보다 당연히 떨어질 줄 알았던 점수가 오히려 올랐다는 소식이었다. 두 곡 중 늦게 시작해 연습을 많이 못 했던 곡이 더 높은 점수를 받았다니 놀라운 반전이었다. 이번 실기는 정말로 참가에만 의미를 두기로 했는데 아침부터 기분 좋은 뒤통수를 맞았다. 엄지 척 이모티콘을 보내면서 한 마디를 보탰다.
“잠시 쉬는 시간이 오히려 약이 되었네. 쉼표의 승리를 축하한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