도다리를 보고 있으면 절로 웃음이 나온다. 한쪽으로 몰려 있는 두 눈 때문에 그렇고, 냉소하고 있는 듯한 삐딱한 입 때문에 또 그렇다. 게다가 납작 엎드린 몸매는 무엇을 위한 겸손인지 모르겠다.
도다리를 보고 있으면 조금 답답하다. 수조水槽바닥에 배를 깔고 있으면서 통 움직이려 들지 않는다. 사람의 시선 같은 것을 즐겁게 하기 위해서라면 아무것도 하고 싶지 않다는 그런 표정이다. 내가 자기를 관찰하고 있어도 좋고 싫증이 나서 돌아서 산다 해도 그만이다.
눈을 맞추려 해도 시선을 주는 법이 없다. 녀석의 눈은 언제나 나의 어깨너머로 허공을 보고 있다. 때로는 내가 답답해서 손가락으로 그의 눈을 겨냥하고 찌르는 시늉을 해 보지만 끄떡도 하지 않는다. 내 손가락과 자기 사이에 유리라는 투명 벽이 있다는 사실을 알 턱이 없는데도 그렇다.
체념일까. 무관심일까. 아니면 권태일까.
같은 처지에 있는 도미며 민어 같은 고기들이 수조 속을 분주히 돌아다니며 먹이를 찾고 출구를 탐색하느라 여념이 없어도 그는 오불관언吾不關焉이다. 돋보기를 닦듯이 다만 두 눈을 가끔씩 끔벅거릴 뿐, '왜 이렇게 수선들이지?' 하는 그런 표정이다. 나가도 죽고 가만있어도 죽을 바에야 무엇 때문에 심신을 수고롭게 할 것이냐는 그런 시큰둥한 얼굴. 자기가 무슨 소크라테스라고 그러는지 모르겠다.
도무지 식욕이란 있어 보이지도 않는 저 작은 입과 홀쭉한 배, 거식증拒食症에 걸린 것인지, 아니면 타고난 금욕주의자인지, 알 수가 없다. 그는 적게 먹고 적게 움직인다. 아니 적게 움직이고 적게 먹는다. 입과 식욕의 함수관계. 분주하게 움직이는 놈일수록 큰 입과 큰 배를 가지고 있다는 사실에 나는 놀란다.
그러나 이것은 어디까지나 고기들의 세계에나 해당하는 것이다. 사람들은 그렇지 않다. 몇 천 억씩 뇌물을 먹는 사람도 보통사람보다 더 큰 입을 가진 것이 아니었다. 도다리를 보고 있으면 좀 헷갈린다. 세상 사물들이 모두 대칭 구조인데 녀석들만은 그것을 거부하고 있기 때문이다. 자기들끼리야 어떨지 모르지만 보는 사람이 우선 힘이 든다.
어느 쪽이 배이고 어느 쪽이 등인지 알 수가 없다. 또 내가 보기에는 같은 가자미 과인데 왜 넙치는 왼쪽에 눈이 몰려 있고 도다리는 오른쪽으로 몰려 있어야 하는 것인지 설명이 되지 않는다. 넙치가 정통이고 도다리가 이단일까. 아니면 그 반대일까. 같은 족속끼리도 저러하니 그들 세계에도 한때, 좌냐 우냐 하는 이데올로기의 갈등 같은 것이 있었다는 말일까.
아니면 마땅치 않은 세상 한 번 비틀어 버리고 싶었는데 그것이 안 되니까 아예 자신을 비틀어 버린 것일까. 그것만이 아니다. 도다리는 길들여지는 것도 거부한다. 광어 같은 것들은 양식養殖이 가능하지만 도다리는 그렇지 않다. 맛은 못하면서도 값은 광어보다 더 비싸게 치는 까닭은 어쩌면 도다리의 이런 오기傲氣 때문인지도 모른다.
"저 늑대를 가두어 보시오. 그러면 나도 그대의 양어장에 들어가리다."
도다리가 하고 싶은 말은 혹시 이런 말일까?
방관자, 반항아. 길들지 않는 야성.
도다리는 오늘도 나의 퇴근길 길목에 있는 횟집 수조 속에서 세상과 나를 비틀어 보고 있는지도 모른다. 아니, 생존을 위하여 허둥대고, 일상에 길들여지기 위해 가시도 지느러미도 다 잘라버리고 사는 나를 그는 비웃고 있음에 틀림없다. 그런데 사람들이 구워 먹기 좋도록 저렇게 납작한 것은 대체 무슨 엉뚱한 친절인지 모르겠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