감 한 알이 내 등 뒤에 '툭' 떨어진다.
깜짝 놀랐다. 놀라게 한 범인이 감이란 것을 알고는 피식 웃음이 나왔다. 누가 담장 밖에서 나를 몰래 엿보다가 돌멩이질을 하는 줄 알았다. 새벽이 되면 이슬 속에서 풀을 뽑고, 물도 주고, 홍고추도 따고 늘어진 토마토 줄기를 걷어올리는데, 그런 내 모습이 너무 억척스럽게 보여서 한번 심술을 부려 본 것일까.
그래도 그렇지. 이런 식으로 사람을 놀라게 하다니. 당당하게 나타나서 너무 부지런 떨지 말라고 말하면 될 것을. 그러면 나는, 새벽에 하는 일이 반나절 하는 일과 같다고 얘기해 줄 텐데. 남의 등 뒤에서 제멋대로 말을 만들어 내고 퍼뜨리는 사람들 때문에 세상이 이토록 소란스러운지 모른다.
여태 살면서 사람을 해코지하거나, 남의 말을 마을회관 스피커처럼 왕왕 댄 적도 없었다. 민들레 홀씨처럼 날아든 풍문을 어딘가로 다시 날려본 적도 없는데, 왜 간밤에 홍두깨처럼 내 등을 후려쳤을까. 내가 가장 멀리하고 싶은 사람은, 남의 등 뒤에서 흉을 보거나 허물을 전하다가 구설수에 휘말려 오금을 못 펴고 안절부절못하는 사람이다. 그래서 감나무는 행여 내가 그런 사람이 될까 봐 감 한 알을 따서 내 등을 향해 힘껏 던진 게 분명하다.
감 한 알이 내 발 앞에 '탁' 떨어진다.
자칫 잘못했으면 감을 밟을 뻔했다. 어제는 등 뒤에 떨어지더니 오늘은 발 앞에 떨어졌다. 경거망동한 내 발을 조심하라는 경고일까, 아니면 바장이는 보폭을 크고 힘차게 내딛으라는 격려의 채찍질일까. 느닷없이 떨어진 감 한 알의 희생으로 타인의 발걸음에 디딤돌이 아닌 걸림돌이 된 적이 없었는지 경계의 끈을 다시 한번 조여본다.
몸의 가장 낮은 곳에서 묵묵히 소임을 다하는 것이 발이다. 잘났다고 뽐내지도 않고, 알아주지 않는다고 탓하거나 분노하지도 않는다. 충직한 신하처럼 주인의 몸을 싣고 세상의 온갖 것들을 밟거나 차이면서 꿋꿋이 살아가고 있다. 그러다 세월이 흐른 만큼 더께처럼 쌓이는 뒤꿈치의 굳은살은, 질곡의 삶을 살아가는 발의 인생 여정이자 혁혁히 빛나는 삶의 훈장이라는 생각이 든다.
갑자기 내 발이 보고 싶었다. 작고 못났을 뿐 아니라 어설퍼서 당당해 보이지도 않는다. 내 몸에 달렸지만 그의 존재를 거의 잊고 살았으니 제대로 대접을 해 준 적이 있었겠는가. 그러나 발이 나를 데리고 다녔기에 사랑을 하고, 계절을 맞이하고, 노을처럼 아름답게 익어갈 수가 있었던 것 같다.
발은 참 많은 뜻을 품고 있다. 말조심하라며 만들어진 '발 없는 말이 천리 간다'는 속담부터 '발 벗고 나서다', '발이 넓다' 등 긍정적인 면과 '발 뻗고 자다', '발에 차이다', '발을 구르다', '발길을 끊다', '발을 빼다', '발이 묶이다', '발이 손이 되도록 빌다' 등 부정적인 면을 더 갖고 있다. 발조심이 곧 몸조심이란 걸 디딜 때마다 가슴에 새겨 준다.
축구에서 헛다리 드리블이란 게 있다. 헛다리로 드리블하면 상대 선수가 절대로 볼을 뺏을 수가 없으며, 내가 실수하지 않는 한 헛다리는 짚지 않는다던 축구 선수 이영표 님의 말이 문득 떠오른다. 축구는 발로 하는 것이 아니라 머리로 한다는 것을 비로소 알게 된 나는, 요즘 같은 세상을 살아가려면 가끔 헛다리 드리블처럼 나만의 기술이 있어야 된다는 생각이 들곤 한다. 지식보다 지혜가 많아야지 삶이 둥글고 부드럽게 흘러가는 걸 보면, 나의 발 때문에 상처받은 이가 많다는 것을 잘 알고 있는 발을 위해, 오늘 밤 쑥탕 한 대야를 준비해야겠다. 그동안 무심했던 나의 행동을 반성하고 용서를 구하는 마음을 함께 담아서.
감 한 알이 내 머리 위에 '똑' 떨어진다.
놀랐을 뿐 아니라 제법 아프다. 하필이면 정수리인가. 다른 데보다 정수리에 떨어져야 정신을 차릴 것 같았기 때문일 것이다. 요즘 무시로 불어대는 마음속의 바람을 눈치챘는지 내리치는 손길이 고추보다 맵다. 오랜만에 정신을 가다듬으로 비로소 내가 보인다.
신체의 맨 꼭대기에 위치한 머리는 우리 몸을 지휘하는 사령탑이다. 탁구나 축구 경기를 보면 손과 발이 부지런히 움직이는 것 같지만, 머리가 명령한 대로 따라 움직이는 심부름꾼이다. 어릴 적 회초리로 손바닥이나 종아리를 맞을 때보다 머리에 맞는 것이 몇 배 더 아프고 자존심까지 상하던 기억이 새삼 떠오른다.
나는 머리가 재빠르게 돌아가지 않아서 맹물 같다는 말을 종종 듣는다. 그러나 그 말이 그리 싫지는 않다. 머리가 잘 돌아가지 않으니 남을 속이거나 나 자신도 속일 줄을 모르고, 또 남의 이목을 의식하지 않아서 행동 또한 자유롭기 때문이다.
나의 머릿속에서 나온 생각과 말들은 유행에서 밀려난 옷처럼 시골 냄새를 풀풀 풍긴다. 이런 머리로 쓴 내 글이 우아한 빛깔과 향을 풍길 수 있을까. 아마도 밑줄 한 줄 그은 흔적이 없는 공허한 글이 되어서 허공 속에 떠돌고 있을 것이다. 제 멋에 겨워 멋대로 쓰다간 언제 또 정수리를 맞을지 두렵다. 이런 내가 아직도 못 미더운지 감나무의 감들이 눈알을 되록되록 굴리며 내려다보고 있다.
감 한 알이 내 가슴에 '톡' 떨어진다.
얼마나 사랑이 그리웠으면 그 높은 가지에서 내 가슴으로 번지점프를 하였을까. 적과摘果를 해 주지 않아서 한 가지에 너무 많은 감이 달리다 보니 사랑을 제대로 받지 못한 듯하다. 하루에도 수십 개씩 떨어지는 감이 감나무의 눈물인 듯 가슴이 저리다.
올망졸망 감을 달고 섰는 감나무를 보면 부모님을 닮았다는 생각이 든다. 가지 많은 나무에 바람 잘 날 없다지만, 흔들리는 가지가 있기에 즐거움과 보람을 느낀다며 감꽃처럼 활짝 웃으신다. 모자라면 모자라는 대로 적게 나누고, 아프거나 힘들 때도 내색하지 않고 가슴을 다 내어 주던 부모님 사랑은, 가을 하늘에 알알이 박힌 주홍빛 감이다. 감나무의 마음으로 다가간다면 세상은 온통 주홍빛 전구를 켠 듯 환해지지 않겠는가.
생명 있는 것들은 모두 사랑을 원하고 있다. 짧은 사랑을 노래하던 매미의 계절이 가고 나니 귀뚜라미가 그 빈자리를 가득 채운다. 밤마다 내 창 앞에서 사랑의 세레나데를 불러대는 바람에 밤잠마저 설친다. 그래도 좋다. 사랑의 몸짓들이 가슴을 데워 주어서. 정수리 한 대를 맞고 나니 사랑을 노래하고 생명 있는 것들을 사랑할 수 있는 마음을 얻은 것 같다.
사랑은 사랑을 낳듯이, 감나무도 내 부모님처럼 자식 같은 감들을 암팡지게 끌어안고 남은 생을 잘 마무리했으면 한다. 작년과 재작년처럼 빈 가지를 망연자실 바라보는 일이 없기를 가을에게 도움을 청해야겠다.
남동생을 잃은 어머니의 마음에 비유할 수는 없겠지만, 감이 없는 감나무를 바라본다는 것도 쉬운 일은 아니다. 진실로 감나무를 사랑해 주지 않았기에 나를 향해 무언의 돌팔매질을 한 듯하다. 감나무의 말에 귀 기울이고, 함께 아파하고 많이 사랑해 주어야겠다. 이 말을 들었는지 감 두 알이 내 무릎 위에 '뚝' 떨어진다. 아, 사랑이 무진장 고팠던 것들.
가지가 휘어지도록 달린 감나무 밑에 앉아서, 밤이 새는 줄 모르게 감 알을 헤아려 보고 싶다. 팔이 아프도록 따서 감빛을 닮은 이웃에게 한 소쿠리씩 건네주고 싶다. 새소리에 놀란 감꽃이 후두둑 떨어지는 계절로 다시 되돌아가 추억 같은 감꽃을 목에 걸고 싶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