치아바타의 시간 /최지안
오늘 점심은 치아바타다. 촉촉하고 부드러운 식감과 시큼한 향은 즉석 빵이 넘볼 수 없는 발효 빵만이 가질 수 있는 매력이다. 속도 편안하다. 과정이 번거롭지만 좋은 것은 그만한 가치가 있다.
어제 숙성 시켜놓은 반죽을 꺼낸다. 두 배쯤 부풀어 있다. 스패출러로 가스를, 잔뜩 부푼 기대감을 뺀다. 주제넘은 욕심. 수고를 생략하고 바랐던 즉각적인 보상. 수시로 들이켰던 김칫국물. 약삭빠르게 바랐던 작은 요행들을 빼고 차지게 반죽한다. 내가 소유했다고 생각하는 것들도 걷어낸다. 집, 자동차, 가방, 시계 같은 나를 포장했던 물질을 걷어내고 남는 것이 진정 나일 것이다.
다시 한 번의 숙성을 거치고서야 반죽은 오븐에 들어간다. 타이머를 맞추고 책을 펼쳐든다. 나머지는 오븐이 알아서 해줄 것이다. 이제 남은 것은 기다리는 일이다. 책을 맛있게 읽다보면 다 구워질 것이다.
치아바타는 시간을 가진 빵이다. 전날에 숙성을 시켜 이튿날에 오븐에 들어가는, 꼬박 하루를 기다려야 손에 들어오는 느림보다. 말하자면 치아바타 안에는 시간의 켜가 쌓여있는 것이다. 발효는 시간을 전제로 하는 기다림이니까.
볼품없는 빵이 지닌 풍미를 먹어보지 않고는 모른다. 어쩌면 밋밋하고 재미없는 빵이라고 할 수 있지만 그것은 단지 겉모습일 뿐. 수수한 사람이 알면 알수록 더 끌리듯 밋밋한 겉과 달리 부드러운 속은 먹으면 먹을수록 자꾸 손이 간다. 담백하고 깊은 미각의 여운이 입안에 남는다. 속 깊은 사람을 진국이라고 하듯 빵도 속이 중요하다. 속을 먹기 전에 겉모양만 보고 쉽게 판단하지 말 일이다. 딱딱한 편견을 버리면 말랑한 속살의 맛을 알게 되리니.
시간의 눈금을 간직한 것은 천천히 먹어야 한다. 아끼는 것은 몸의 감각으로 더듬어 음미한다. 먼저 눈으로 스캔한다. 표면이 노르스름하고 밀가루가 살짝 묻어있는 투박한 모양새다. 자르면 속이 보이는데 구멍이 숭숭 뚫렸다. 이것은 잘 발효되었다는 증거다. 발효 빵의 기본은 발효다. 연기자의 기본은 연기력이고 작가의 기본은 필력이다. 외모나 학력은 그 다음이다. 기본을 지켜 구운 자연적인 색감과 구멍이 소박하고 건강하게 보인다.
다음은 후각으로 들이마신다. 하룻밤을 숙성시킨 시큼하고 부드러운 발효향이 비강을 지나 뇌를 자극한다. 딱딱한 감성이 금세 말랑해진다. 냄새가 주는 위안이 편안하다. 달콤한 향이 즉각적인 얕은맛이라면 코로 들어온 발효 향은 내밀하고 깊어서 몸속 바닥까지 휘젓는다. 깊은 속내에 끌린다.
그 다음 촉각을 느낀다. 치아바타는 손으로 뜯어먹어야 맛있다. 뜯었을 때 전해지는 감촉을 느끼면서 먹는다. 손끝에 닿는 부드러운 탄력과 쫄깃한 쾌감이 뇌를 터치한다. 첼로 줄을 가볍게 튕겨내듯 저음으로 당겨오는 촉감. 가위나 칼로 자를 때는 손끝에 아무런 느낌도 전달되지 않지만 손으로 자를 때에는 질감에 따라 각각 다르다. 크로와상은 지방의 결대로 분리되지만 껍질은 우수수 부서져 정신없다. 식빵은 촉촉해서 섬세하게 찢어진다. 카스텔라는 허망하다. 아무런 저항도 없이 너무 쉽게 잘라지기 때문이다. 나는 치아바타를 뜯을 때 가장 즐겁다. 그 탱탱한 저항감이라니.
최종적으로 미각만 남았다. 하이라이트다. 모든 것은 이 순간을 위해 존재한다. 그냥 먹어도 맛있지만 올리브유나 발사믹소스에 찍으면 더 맛있다. 커피도 한 모금 마시고 휴대폰 카톡도 확인해가며 야금야금 먹어야 맛있다. 천천히, 안단테 혹은 안단티노로 음미한다. 씹는 맛과 넘어가는 맛 두 가지 화음으로.
빵을 먹을 때 가장 행복했던 사람은 누굴까. 가장 맛있는 빵을 먹은 사람? 아니다. 아마도 슈호프가 아닐까. 세상에서 가장 맛없는 빵을 먹었던 사내. 『이반 데니스소비치의 하루』의 주인공 슈호프는 빵 한 조각을 먹는 것에 대하여 이렇게 말한다. 입에 빵을 조금씩 넣고 혀끝으로 이리저리 굴리면서 침이 묻어나도록 한 다음에 씹어야 한다고. 러시아의 춥고 열악한 수용소에서 제대로 된 식사를 배급받지 못하는 수감자들에게 먹는 일이란 생존과 직결된다. 딱딱한 빵 한 조각을 헝겊에 싸서 침대 모서리에 신중하게 숨겨두는 모습은 먹는 것의 절실함을 보여준다. 그 몇 줄만으로도 그가 심사숙고해서 빵을 씹고 음미하는 행복한 모습이 그려진다. 침을 삼키고 빵을 넘기는 소리까지 들릴 듯하다. 실제로 수용소 생활을 했던 수염이 텁수룩한 솔제니친의 얼굴까지 겹쳐지면서 말이다.
빵은 해치우듯 먹는 것이 아니다. 햄버거를 먹어치우듯 한입에 욱여넣는다는 것은 빵에 대한 예의가 아니며 먹는다는 것의 함의를 간과하는 것이다. 『백석의 맛』이라는 책의 저자는 음식을 먹는다는 것이 단순히 필요한 에너지를 얻는 행위에 그치는 것이 아니라 ‘나’는 누구인지 세계관은 무엇인지, 또 ‘나’와 세계는 어떻게 관련되어 있는지 깨닫게 되는 계기가 될 수 있다고 한다. 그러니까 빵을 먹는다는 것도 단순히 배를 채우는 것이 아니라 영혼을 위로하고 분위기를 만들고 자신의 철학을 지키고 더 나가서 문화를 먹는 행위인 것이다.
이탈리아를 여행할 때 몇 번 먹었던 음식이 파니니였다. 샌드위치처럼 빵이나 치아바타 사이에 햄이나 채소를 넣은 것이다. 트레비 분수 주변의 일리(illy) 카페에서 치아바타 사이에 구운 가지가 들어간 파니니를 먹었다. 소스가 전혀 들어있지 않았는데도 맛이 좋았다. 양념이나 조미료를 넣지 않은 재료 본연의 맛을 살린 음식을 좋아하는 나로서는 꽤 마음에 들었다. 카페 샤케라또와 함께 먹었다. 매끄럽게 목을 넘어가는 샤케라또의 시원하고 진한 맛에 흡족해 했던 큰애와 파니니의 담백한 맛에 행복해 하던 작은애. 동전을 넣으면서 빌었던 소원에 대하여 우리가 나눴던 이야기. 많은 인종이 걷고 있는 흥겨운 로마의 거리. 그런 분위기가 좋았다. 내가 즐기고 먹고 싶은 한 끼란 그런 것이다.
빵을 좋아한다. 굽는 것도 좋아한다. 빵을 굽는다는 것. 그것은 기다리는 일이다. 밀가루를 체에 치고, 반죽을 하고, 발효되길 기다리고, 구워지는 걸 기다리고, 그 시간을 기다림으로 기다리는.
누군가를 기다리는 일.
무언가를 염원하는 일.
그것은 힘든 일이다. 시간의 기둥에 발을 묶어 나를 발효시키는 일이다. 연해지고 순해지고 깊어지는 일이다. 수필을 쓰는 것처럼.