책상 / 박소현

 

재활용품 분리수거장에 책상 하나가 버려져 있다. 가죽 상판에 곡선으로 된 다리에는 섬세한 조각이 새겨진 고급의 앤티크다. 몇 군데 미세한 흠집은 있으나 조금만 손질하면 한참은 더 쓸 수 있을 것 같은데 누가 이 멋진 책상을 버린 것일까?

“쓸 사람이 없어 내 놓으니 필요하신 분은 가지고 가세요.”

쓸 사람이 없다니? 책상 형태로 보아 학식이 깊은 학자이거나 높은 지위를 가진 사람이 썼을 것 같은데, 책상 주인이 어디 멀리로 가 버리기라도 한 것일까? 아니면 새로 입주한 아파트라 새집에 어울리지 않아 버려진 것일까? 일주일 동안 가져가는 사람이 없으면 폐기처분 하겠다며 단정한 손 글씨로 메모까지 붙여 놓았다. 삶의 현장에서 퇴출된 노동자처럼 책상의 품새가 애처롭다. 저 책상도 한때는 성공한 주인을 만나 애지중지 사랑을 받았을 텐데…. 나는 책상을 집으로 가져가고 싶은 욕심에 이리저리 살펴보고 서랍도 열어보다 이내 마음을 접었다. 식구들 잔소리를 한참이나 들어야 할 것 같아서였다.

중학교에 다닐 때까지 나는 책상이 없었다. 월례고사를 칠 때가 되면 작은 밥상을 펴 놓고 전과나 수련장을 보거나 방바닥에 엎드려 교과서를 읽던 게 고작이던 시절이었다. 나뿐만 아니라 시골 아이들 대부분이 그랬으므로 그때까지 나는 책상에 대한 동경 같은 건 없었다.

초등학교 6학년 때였다. 고등학교에 입학한 작은오빠가 공납금 전액 면제에 학기당 2만 5천원의 장학금을 받게 됐다며 집안은 축제처럼 술렁거렸다. 그럴 만도 했다. 마을엔 고등학교 입시에 실패한 아이들도 있는데 오빠가 장학금까지 받아버렸으니. 오랜만에 개떡을 찌고 부침개를 부치며 엄마 얼굴에도 모처럼 햇살이 퍼졌다. 동네 사람들도 부러운 눈초리로 오빠 머리를 쓰다듬기 바빴다.

오빠는 장학금을 받기 위해 어지간히 이를 간 모양이었다. 자신의 꿈이 좌절될까 봐 가슴 속에서 비수를 갈았는지도 모를 일이었다. 그 장학금은 1년 전에 남편을 잃고 힘겹게 자식들 뒷바라지를 해야 했던 엄마에게 살아갈 용기를 준 화수분이었다. 오빠를 부산에 있는 고등학교에 진학시키기 위해 이리 뛰고 저리 뛰며 혼신의 힘을 다했던 엄마. 하지만 아버지 병원비로 가산을 거의 다 날려버린 우리 형편에는 실현불가능한 일이라는 걸 엄마는 너무도 잘 알고 있었을 터이다. 무학으로 한글조차 제대로 깨치지 못했던 엄마는 어디서 그런 용기가 났던 것일까?

형편도 어려운데 고등학교가 다 뭐냐며 상급학교 진학을 말리던 집안 어르신과, 그동안 연필 한 자루 사 줘 본 적 있냐며 대들던 오빠의 실랑이도 한 순간 장학금 속에 묻히고 말았다. 어르신은 아마도 엄마 혼자 힘들게 우리를 가르치는 게 안타까워서 그랬을 것이다.

오빠가 받은 장학금으로 엄마가 제일 먼저 한 건 목공소에서 책상을 맞춘 일이다. 나뭇결이 그대로 살아있는 원목에 투명 포마이카로 광을 낸 ‘삐까번쩍’한 책상이었다. 서랍도 세 개나 달려 있었다. 그 책상이 우리 집으로 오던 날, 오빠는 앉은뱅이책상에 대충 쌓아 두었던 책들을 정리해 숨 쉴 틈도 없이 빼곡하게 세워놓았다. 무슨 비밀이라도 숨겨둔 양 서랍은 꼭꼭 잠가 놓고 아무도 손을 못 대게 했다. 범접할 수 없는 성역처럼 내가 넘봐서는 안 되는 금지구역이었다.

시험 때가 되면 온 동네가 깊은 어둠에 잠기고 소리 없이 무서리가 내리는 새벽녘까지 오빠 방 30촉 알전구는 꺼질 줄을 몰랐다. 멀리서 밤 부엉이만 간간이 울어대던 밤이었다. 엄마는 꾸벅꾸벅 졸면서도 공들여 바느질을 하며 오빠 방 불이 꺼져야 비로소 지친 몸을 뉘었다.

“느거들은 뭔 잠이 그렇게도 오노? 뭔 일이든 지가 열심히만 하면 되는 기라. 선희는 저녁에 물을 한 양재기 떠놓고 목이 마르면 물을 마시면서 공부하다 그 물이 다 떨어져야 잠을 잤다 안하나. 그래 갖고 서울에 있는 이화여대에 간기라. 눈 버끔 뜨고 남이 하는 거 그걸 왜 몬하겠노?”

초저녁부터 쿨쿨 자고 있는 나와 동생이 한심스러웠던지 엄마는 이웃 동네 선희 언니 얘기를 혼잣말처럼 중얼거리고 있었다. 그때부터 나도 책상을 갖고 싶은 절실한 소망 하나가 생겼다. 오빠가 없을 때면 슬쩍슬쩍 거기에 앉아 공부하는 폼을 잡아보기도 하면서 언젠가는 나도 저런 근사한 책상 주인이 되리라 소원했다. 고등학교를 졸업한 오빠가 타지로 나간 후에야 그 책상은 겨우 내 차지가 되었다. 하지만 책상에 대한 욕심 같은 건 이미 나에게서 멀어진 뒤였다. 나 또한 얼마 뒤 고향 집을 떠났기 때문이다. 그 책상 덕분이었을까? 몇 년 후 오빠는 관세직 공무원이 되어 엄마의 바람을 어느 정도 해소시켜 주었다.

얼마 전, 작은오빠 아들 결혼식이 있어 모처럼 가족이 다 모이게 되었다. 나는 엄마에게 그 책상을 어떻게 했는지 물었다. 94세의 나이로 순간순간 지난 일을 잊어버리는 엄마는 아예 책상의 존재조차 기억하지 못했다. 이제는 그때의 엄마보다 훨씬 더 나이를 먹어버린 자식들만 옛날 그 책상 이야기를 하며 숙연해졌다.

삶의 질곡 속에서도 엄마의 든든한 꿈이었던 작은 포마이카 책상. 미처 붙잡을 겨를도 없이 50여 년의 세월이 흘러버린 지금, 식구들은 아무도 그 책상의 행방을 알지 못한다. 서로의 마음속에서 아릿한 기억으로만 남아 있을 뿐.

재활용품 분리수거장의 책상은 새 주인을 기다리는 듯 며칠째 오도카니 앉아 자리를 지키고 있다. 누군가가 가져가지 않으면 폐기물처리장으로 실려 가 영원히 퇴출 될 터이다. 다시 며칠이 더 지나도 찾는 이가 없었다. 낡은 시간들이 수런거리는 소리가 책상 속에서 다급하게 흘러 나왔다. 처연한 달빛 하나가 유유히 책상을 비춰 주고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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