규화목 / 김추리
나무의 죽음인가. 돌의 탄생인가.
생을 마치는 순간, 나무는 주검을 늪에 묻히고 새로운 숨을 쉬었다. 들숨 따라 시작된 광물들의 침투로 온몸에 색색의 열꽃이 피었다. 어둠의 배려로 수백 년 지난 삶을 망각하고 날마다 수만 년을 이어갈 신화창조를 꿈꾸었다.
무엇을 바라는가. 무엇을 기다리는가.
우주 멀리, 저 멀리, 안드로메다의 별들이 보내주는 신비의 빛으로 나무의 진액을 뱉어내면서 꼿꼿하게 맥을 세우고 본연의 결과 동그란 나이테를 움켜쥐었다. 긴긴 날이 속속 지나가고, 죽고도 죽지 않은 나무돌이 되어 수만 년 살아갈 새 생명을 부여받았다.
규화목. 나무가 죽어, 새로운 몸으로 태어나서, 화석이 된, 새 이름이다. 모양도 성질도 치환의 고통과 경이로움으로 단련하여 견고한 돌이 된 나무. 화석이 된 나무.
나무의 숨이 멎자 미생물이나 박테리아가 달려들었을 터다. 주검이 썩기 전, 늪지대나 갯벌에 파묻히기도 했다. 진흙에 몸을 부린 채 침잠하거나 모래바람에 묻히게 되었을 그 때, 광물질이 공기보다 앞서 죽은 나무의 물관을 타고 스며들었다. 점, 점, 점, 아주 기나긴 시간 동안 파랗고 붉은 또는 노란색의 빛이 스미어 신비스런 광물이 되었다. 본래 나무의 성분은 다 사라지고 형태는 그대로 화석으로 남았다. 나무나 돌이나 감각이 없는 무정물이긴 매한가지이나 아무리 소소영령이 없다 한들 생장하는 생물인 나무와 무생물인 돌이 똑같을 수는 없겠다는 생각은 나의 무례함인가.
그러나 나는 광물로 태어난 규화목을 나무의 화신으로 우러르고 사랑한다. 오래된 것들에게 보내는 나의 존경 방식이다. 비록 누군가가 과학의 힘을 빌려 알아낸 상식으로 규화목의 내력을 읽었지만, 규화목을 마주친 순간 나는 그 신비스러움에 감동할 수밖에 없었다.
맨 처음 규화목을 만난 건 오래전, 창덕궁 후원 승재정 앞에서였다. 검은빛이 나는 그 돌이 예사롭지 않아 걸음을 멈추고 오래 들여다보았다. 짧은 안내문을 읽고 나서야 그 돌 같은 나무가 아니, 나무 같은 돌이 생전 처음 보게 된 규화목이란 걸 알았다. 규화목이란 걸 어렴풋이 알고 나니 차츰 그것에 관심이 일고 눈이 틔었다. 베이징 여행을 할 때는 일부러 ‘규화목 공원’을 찾아가게 되었고 제주도를 여러 차례 오가면서도 관심 두지 않았던 ‘생각하는 정원’의 규화목을 일부러 찾아가 관람했다.
그 몇 년 후, 곤지암 ‘화담숲’에 갔다. 소문대로 잘 조성된 아름다운 숲이었다. 매끈하게 닦인 길을 따라가며 경쾌하게 봄을 노래하면서 마음껏 풍광을 즐겼다. 자작나무 숲을 지나고, 분재처럼 잘 다듬어 가꾼 소나무 정원을 지나고, 120년이나 된 분재가 있는 예사롭지 않은 분재원을 휘 둘러보고 나오는데 와~, 각양각색의 규화목들이 나타났다. 인도네시아산 규화목으로 300점이나 된다고 설명문에 적혀 있다. 이런 광경을 만나면 으레 환호작약하며 탄성이 터지고 가슴이 쿵쾅쿵쾅 뛸 법도 한데 그날, 그 앞에 서니 오히려 마음이 차분해지며 발걸음은 천천히 조신해졌다.
크고 작은 규화목을 향해 마치 백 살 어른을 뵙듯 눈인사를 올렸다. 오랫동안 참선을 하다 열반에 든 선승의 모습이 저러할까. 골고다의 예수의 자태가 저러할까. 단군신화 속 태백산의 신단수가 저러할까.
숭고하다. 내 눈에는 저 규화목이 아무리 봐도 돌이 아니다. 나무가 아니다. 금강석도 아니다. 마치 저 나뭇결 결결마다, 나무 아닌 나무 어디에서, 혼령이라도 나올 듯 매섭다. 범접 못할 서릿발 같은 기운에 오싹 한기가 들 정도로 고고하다. 분명 나무이면서 석영인 양 매끈매끈 보석인 듯 반짝거리는 돌. 예측하기 어려운 수많은 시간을 품어 안고 견디며 지내온 시간들을 끌어안은 나무 아닌 나무, 앞으로 수만 년을 살아가야 할 돌 아닌 돌, 죽었으면서 살아 있는 나무의 혼신이 스민 돌이다.
규화목 앞에 엎드려 그의 오래된 몸을 만져본다. 셀 수 없는 수많은 시간들이, 압축된 차가운 몸결이 손바닥을 타고 뜨겁게 건너온다. 차곡차곡 채워 눌러둔 나의 가슴이 누름돌을 들추고 나와 속속들이 함께 타오른다.